090912 01편 영주의 심성 - 부석사01
090912 화계사 불교대학 2학년 졸업반 성지순례
영주 부석사
아침 8시 조금 늦게 화계사에서 출발할 때 비가 퍼붓듯 오더니
고속도로에서는 조금씩 개어가고 있었다
그나 저나 토요일 아침 고속도로 사정은 대단하여
영주 부석사까지 무려 6시간이나 걸려 오후 2시에 도착하였다
준비되어진 산채비빔밥으로 점심 공양을 하고선
영주의 심성 '부석사'로 오른다
15년전쯤 영주로 오는 터널이 뚫리기전 고개를 넘어 넘어 영주로와
부석사를 한번 들러고선 두번째 방문 길이다
부석사 입구에 조성된 인공폭포
9월 중순 사과밭엔 온통 사과들이 익어가고 있고..
철에 일찍나오는 홍로를 파는 가게들이 많다
부석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676년에 창건하고 화엄종을 널리 전했다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 의상전(義湘傳)에는 의상과 선묘, 부석사 창건에 관한 설화가 자세히 적혀 있다.
의상을 부석존자(浮石尊者)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 하는 것은 이 절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1372년(공민왕 21) 원응(圓應)국사가 가람을 크게 중창했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을 비롯하여 원각전·응진전·안양루·선묘각·범종루·자인당 등 조선시대의 건물들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무량수전앞석등(국보 제17호)·소조불좌상(국보 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3층석탑(보물 제249호)·당간지주(보물 제255호)·고려판각(보물 제735호)·원융국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이 절의 창건설화와 관련있는 석룡(石龍)·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 등이 전해지고 있다.
평면도에서는 절의 배치가 한 눈에 들어오나 ..
부석사가 위치한 소백산 남쪽 자락은 경사가 급한 편이기 때문에
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하여 아래에서부터 위로 상승해가는 절의 배치는 절대로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산세와 더불어 대지의 단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풍광과 건물이 하나씩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 공간은 아래로부터 일주문 공간, 천왕문 공간, 인양루 공간, 무랑수전 공간과 그 뒤의 조사당과 자인당 공간이 있다.
무한대로 펼쳐진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을 절마당으로 끌어안기 위하여 경사진 봉황산 중턱에 터를 만들고 많은 계단과 돌축대로 배치하였고 축대 또한 앞산 능선에 조화시키기 위해 조금씩 각도를 달리하였다.
즉, 중심 동선이 일직선으로만 뻗어 오르게 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 안양루에 오르면서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방향과 사람의 진입방향을 'ㄱ'자로 꺾어 놓음으로써, 착각과도 같은, 깊이 있는 자연스러운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부석사의 자연과 어울어진 배치는 고건축사를 통털어 극찬을 받고 있으며 무량수전등
전통건물과 함께 동양적인 아름다움의 표준이 되고 있으며 현대건축에도 응용되고 있다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산세와 부응하기 위해 건축물의 드러남은 최소화했다. 방문객은 건물에 다가가면서 능선의 흐름에
따라 외부 공간이 순차적인 변화를 보이며 전개되는 것을 경험한다. 3만4000m²에 이르는 방대한
연면적을 생각하면 정말 훌륭한 성취다. 김태수는 이런 공간 구성을 위해 ‘단(段)’을 만들었다.
그는 “경북 영주 부석사가 산세를 다루는 좋은 가르침이 됐다”고 했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산세와 더불어 대지의 단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풍광과 건물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구성이 설계의 주요 모티브가 됐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부석사처럼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접근하며 감상해야 제맛이 난다.
국립현대미술관 설계자인 김태수씨는 설계당시 10번이상 부석사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부석사 오르는 길 양편에는 주렁 주렁 메달린 사과가 한창 익어가고 있다.
부석사 일주문
일주문에 서도 절집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부석사 답사는 아래부터 차근차근 걸어 올라가면서 하나하나씩 나타나는 절집의 모습을 음미하면서 느껴야한다.
일주문의 뒷편
'해동화엄종찰' 이라 적혀있다.
일주문을 지나 걷는 은행나무길. 10월 중순이면 부석사 오르는 길은
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으로 더욱 유명한 길이다
부석사 당간지주(통일신라시대) -보물 제 255호
은행나무길을 계속오르면 가리운듯 슬며시 나타나는 천왕문
천왕문을 들어서면 삼층석탑이 좌우에 위치한다
통일신라후기 3층석탑으로 쌍탑이다.
인근 폐사지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삼층석탑중 오르면서 오른쪽에 위치한 탑 옆으로 수돗가에서 저 위에 위치한 안양루를 바라보면
누각의 뒷편에 앉아계신 6위의 부처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누각의 공포(섯가래와 지붕사이의 받침대) 사이의 공간이 배경과 빛이 조화되어서 부처상으로 보이는 것으로 실제로 가면 부처의 형상은 보이지 않는 신비한 착시현상이다.
이를 공포불 또는 현현불이라 한다
보리수 나무
왼쪽에 위치한 삼층석탑
무량수전으로 가기 전에 만나는 첫번째 누각인 범종각
마치 큰 새 한 마리가 양팔을 벌리고 날아갈듯한 모습이다.
범종각의 지붕은 정면쪽은 팔작(八作)지붕을 하고 있고, 뒷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범종각은 건물의 방향이 다른 건물과 달리 측면으로 되어 있다.
건물을 측면으로 짓고 지붕의 모양새를 달리한 것은
부석사 건물 전체의 분위기가 소백산을 향해 비상하는 모양을 띠고 있는데
그것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범종각 아래에서 보이는 안양루와 무량수전
종각
범종각을 지나면 부석사의 백미인 안양루와 그 뒤의 무량수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부석사의 최고 미학은 '숨김'이다.
부석사로 가는 산길은 여러 겹으로 굽어 있으며,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다시 천왕문을 지나고, 석벽을 올라 범종각을 지나가면 안양루가 나온다.
다른 가람들처럼 쉽사리 대웅전을 보여주지 않는다.
안양루를 지나갈 땐 누구라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렇게 잠시 땅을 보고 걷다가 정면을 응시하면 배흘림양식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나타난다.
▣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 18호)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 18호) 은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 15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주심포 사원건축 양식연구의 표본이기도 하다.
090912 화계사 불교대학 2학년 졸업반 기념사진 -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송수권 -
천고에 몇 번쯤은 학이 비껴 날았을 듯한
저 능선들,
날아가다 지쳐 스러졌을 그 학 무덤들 같은 능선들,
오늘은 시끄럽게 시끄럽게 그 능선들의 떼 울음이
창해에 끓어 넘친다.
만상이 잠드는 황혼의 고요 속에
어디로 가는지 저희들끼리 시끄럽게 난다.
浮石寺 무량수전 한 채가 연화장을 이룬
그 능선들의 노을 빛을 되받아 연꽃처럼 활짝 벌고
서해 큰 파도를 일으키고 달려온 善妙 낭자의 발부리도
마지막 그 연꽃 속에 잦아든다
장엄하다
어둠 속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또 한 능선이 자물리고 스러지면서
하는 것
마침내 태백과 소백, 兩白이
이곳에서 만나 한 우주율로 쓰러진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배흘림 기둥
기둥의 중간이 배가 부르고 아래위로 가면서 점점 가늘어지게 만드는 방법. 구조의 안정과 착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수법으로, 그리스를 비롯한 한국·중국·일본 등의 고대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삼성각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이 큰 돌은 아래 받침돌 어디에도 닿지 않고 떠있다고 하나 실제와는 다른 전설일 것이다
부석의 가운데 많은 부분은 아래 받침돌이 없어 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무량수전의 현판 글씨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온 공민왕의 글씨라 전해진다
무량수전(국보제18호)내에는 소조(진흙으로 만든 불상) 아미타여래 좌상(국보제45호)
특이하게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 제17호. 높이 297cm.
이 석등은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약화된 간결한 모습이나 상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석등임을 알 수 있다.
안양루
아미타 부처님을 모시는 극락전이 본당인 절에서는 극락을 의역한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안양교·안양문·안양루 등을 갖추기도 한다.
부석사
김삿갓
평생에 여가 없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 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타고 달려 오듯,
우주간에 내한몸이 오리 마냥 헤엄 치네.
인간 백세에 몇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안량루에서 바라보는 부석사 최고의 풍치
송수권시인이 노래한 태백과 소백이 양백으로 하나의 우주율로 만나는 곳
안량루에서 본 부석사 전각들
부석사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