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110226-27 경주 성지순례01 분황사

관오덴짱 2011. 2. 28. 23:34

 

10226-27 경주 성지순례01 분황사

 

2011년 2/26 1일째 일정


오전 7시 화계사 출발

11:45-12:30분 점심식사

12:30- 01:20 분황사

01:20-02:20 황룡사지

03:00-04:30 불국사

05:30-06:10 기림사

저녁후 사조리조트 1박


2/27 2일째 일정

06:30 숙소출발

07:00 - 08:20 석굴암

아침식사

10:50-11:30 이견대와 대왕암

11:40-12:00 감은사지

점심후 서울로 출발

 

2011년 2월 26일,27일 1박2일간

경주일원 성지순례


2011년 2월26일 토요일 오전 7시가 조금 넘어 41명의 화계사 불교대학 15기를 주축으로한

여러 도반님들과 14기,17등 동참하신 분들을 가득 태우고 화계사 버스는 경주로

성지순례를 향했다.


경주는 신라천년의 고도(古都)로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며 불국(佛國)을 꿈꾸던

신라인들의 이상향이 고스란히 담긴 도시다.


이번 성지순례가 특별한 건 작년인 2010년 화계사 불교대학원에서 1년동안 법화경을

문광스님께 배우며, 이 법화경의 내용을 고스란히 재현한 법화도량인 불국사와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도량인 황룡사, 문무대왕릉인 대왕암과 감은사지를 포함한

경주,감포일원의 도량들을 문광스님을 모시고 다시 한번 설명을 들으며 순례를 한다는 점이다.


버스는 예정보다 약간 일찍 경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교동고분군을 지나 경주 시내

대릉원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대릉원 안에는 미추왕릉과 황남대총 천마총등이 있다

 

 

 

 

 

대릉원 인근에 몰려있는 쌈밥집들 중 삼포쌈밥에서 점심공양을 하러 가는 일행을 잠시 떠나

첨성대로 가면서 동부사적지의 고분군과 첨성대를 사진에 담는다.

 

 

 

천마총,황남대총등이 있는 대릉원과 대릉원에서 첨성대 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길은

경주 역사 유적지의 황금대로다.  

 

 

 

경주 동부 사적지대

 

 

 

동서로 안압지에서 교동까지 남북으로 월성 남쪽의 남천에서 첨성로까지 이르는 광대한 사적지역이다

 

 

 

신라 왕경의 중심지로 월성 안압지 계림 첨성대등 중요한 사적이 많을 뿐만아니라

 

 

내물왕릉등 수십기의 신라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어 옛 신라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첨성대

 

첨성대(瞻星臺)는 경주시 반월성 동북쪽에 위치한 신라 중기의 석조 건축물로,

선덕여왕대에 세워진, 이미기네스북에 등재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1962년  국보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첨성대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 북편에 위치하고 있다.

362개의 화강암 벽돌을 사용하여 원통형으로 축조하였다.[

높이는 9.17미터[4]로 바탕의 지름은 5.17미터, 상층부의 지름은 2.5미터이다.


2층의 기단이 있고, 대략 30센티미터 두께의 돌로 27층을 쌓았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우물 정(井) 모양의 2층의 천장돌이 있다.

 

 

13층에서 15층에 이르기까지 정남향의 네모난 문이 있고, 이 문의 아래로 12층이 있고

위로 13층이 있으므로 첨성대 위아래의 중간에 문이 위치한다.

 

내부에는 12단까지 흙이 채워져 있고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이다.

 

첨성대가 위치한 지역에서는 평지임에도 별을 관측할 수 있는 곳이라고 문광스님께서

설명하여 주신다

 

 

 

 

첨성대의 야경  

2008년도 경주 남산을 들렀을때와

2010년 5월  경주와 감포를 돌았을때 찍었던 첨성대 야경사진이다

 

 첨성대는 밤이 되면 조명을 받아 더욱 이뻐진다

경주에서 안압지와 함께 최고의 야경이다

 

 

 

 

동부 사적지대의 신라 고분군들

 

 

첨성대의 건너편에는 계림이 보인다

 

 

월성과 계림 안압지등을 갈 수 있는 신라의 중심지다

 

개인적으로는 월성이씨(지금은 경주이씨라고 한다)라 반월성이 있는 경주에 오면 더욱 반갑다

문광스님처럼 한학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비슷하게 집안의 계보를 배우며 자랐다

 

어릴적 월성이씨(경주이씨) 시조할아버지인 이 알자 평자(신라가 구성되는 박혁거세 이전에 형성된

육촌부락의 첫번째 부락 촌장이시다. 박혁거세 알을 주워온 3째부락 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모시고 신라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신분이다) 

할아버지로 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계보 액자를 집에 걸어 두고 보면서 자랐다

 

 

 

 

 

 

 

 

 

점심 공양을 한 삼포 쌈밥집

 

 

쌈과 함께 여러가지 반찬이 나온다

 

 

옛날 물건들이 많다

 

 

 

경주 성지순례를 이끌어 주신 문광스님

 

 

1960년대 신문

 

 

 

 

 

 

 

 

 

 

점심 공양후 첫 번째의 순례지는 분황사다.

 

 

분황사(芬皇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세워진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분황’이란 선덕여왕을 일컬음이니 분황사는 황찰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크게 중흥했던 신라의 전성기와 함께 한 사찰이며 신라 고승인 원효와 자장이 거쳐가기도 했다. 원효는 이 곳에서 ≪화엄경소(華嚴經疏)≫≪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등 저술 활동을 하여 많은 저작을 남겼고, 법성종(法性宗)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 이 고상은 고려 시대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다.


6세기에 먼저 지어진 황룡사와는 담을 맞대도록 바로 옆에 건축되어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다.

 

경주 신라 유적지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첨성대와 내물왕릉이 바로 서쪽에, 선덕여왕과 진평왕의 능을 비롯해 설총의 묘는 동쪽에 있다.




본래 규모가 큰 절로서 많은 유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고려 말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작고 아담한 사찰이 되었다. 문화재로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적, 삼룡변어정, 약사여래동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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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

 

 

 

 

 

 

삼룡변어정: 전설에 따르면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 속에 사는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 빼앗아왔다 한다.

남아있는 신라 우물 가운데에서는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다

 

 

우물인 삼룡변어정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원성왕 때의 호국룡 이야기에서 무대가 되는 곳이다. 이 우물은 외곽 바탕은 사각으로, 우물 외부는 팔각으로, 내부는 원으로 설계되어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분황사에 대하여 설하여 주시는 문광스님

 

                                      원효선사의 사상을 연구하는 원효학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고 하셨다 

 

 

 

 

 

 

 

 

 

분황사 약사 여래 입상

 

 

 

 

 

 

 

 

 

 

보광전 내부의 원효선사

 

 

 

 

 

 

 

 

 

 

화쟁국사비편: 우물 옆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비대좌는 고려 시대 때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 비이다. 고려 숙종6(1101) 8월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비신을 받쳤던 비대가 절 근처에서 발견되자 김정희가 이를 확인하고 비대좌 위쪽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이라고 써놓았다.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국보 제30호

 

 

 

전돌(塼塔)을 모방하였으므로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른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분황사 창건 때인 신라 선덕여왕 3년(634)으로 보고 있다.

 

 

 

 

현재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 들어 있던 사리함을 꺼냈는데, 함 안에는 각종 옥류, 가위, 은바늘 및

숭녕통보(崇寧通寶), 상평오수 등 고려시대의 중국주화가 발견되었다.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모전석탑은 본래 7층 또는 9층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래 3층만 남아 있다.

 

 

 

 

 

 

 

분황사 옛 석물들

 

 

 

 

 

 

 

 

 

 

 

2편 황룡사지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