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110226-27 경주 성지순례 - 못다한 이야기와 자료

관오덴짱 2011. 3. 14. 20:51

110226-27  경주 성지순례 - 못다한 이야기와 자료

 

 

황룡사의 장육존상

 

 

                            황룡사지 금당터의 3개의 대좌석  장육존상을 모셨던 돌이다

 

중국 사천성의 아육왕상 

 

1500년을 건너온 아육왕상의 황홀경 --  한겨레 기사

 

신라의 3대 보물 중 하나였다는 경주 황룡사터의 16척 짜리 금동불상,

이른바 장육존상(丈六尊像)의 역사적 뿌리는 어디서 비롯됐을까.

 

장육존상은 인도를 처음 통일한 아육왕(아쇼카 왕:재위 기원전 273~232년)이 배로 철과 황금을

신라로 보내어 주조를 간청했다는 신비의 대불이다. 결국 신라 장인들이 진흥왕 때인 574년 완성하고 황룡사 금당에 모셨지만, 이 아육왕 불상은 13세기 몽골군 침공 이후 홀연 사라져버린다.


<삼국유사> 등에 단지 기록만 남았을 뿐 그 실체가 오리무중인 이 불상의 양식적 정체는 무엇일까.

 

 한반도-중국의 고대 문화교류사를 연구해온 국내 고고·미술사학자 모임인 육조문물연구회 회원들이 지난 17~21일 중국 중원 대륙 깊숙한 쓰촨성(사천성) 청두 일대를 누비고 다닌 건 아육왕 불상으로 대표되는 인도-중국-한반도 불교문화 교류의 자취를 살펴보기 위한 여정이었다.

 

 ‘차마고도’의 시발지로도 유명한 쓰촨성 불교 문화유산들이 인도에서 미얀마, 티베트 산악지대 등을 거쳐 중원의 남북조 수당 왕조와 한반도 삼국에 불상 양식을 퍼뜨린 남방실크로드 교류사의 거점이기 때문이었다.

 

 

 


“아! 황홀하네요. 이렇게 많은 아육왕상을 보기는 처음이에요.”


박순발 충남대 교수(고고학)가 이끄는 답사단이 지난 17일 낮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쓰촨성의 고도

청두의 쓰촨성박물관.

 

3층 석각실에서는 종일 육조문물연구회 회원들의 탄성이 그치지 않았다. 5~6세기 남조시대

조성된 아육왕 불상으로 추정되는 육감적인 조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진열되어 있다.

 

청두 도심의 남조 사찰 만불사 터에서 출토된 이 불상들은 어깨부터 다리까지 늘어뜨린 옷주름에

몸의 굴곡이 은은하게 드러나는 시스루풍 패션이다.

 

강희정 서강대 조교수(불교미술)가 간이등을 비추며 설명해준다.


“여기 조상들을 보면, 아육왕상은 인도 굽타 양식의 은은한 주름이 있는 입상이 특징이었던 것

같아요. 아육왕이 불교의 이상적 통치자 전륜성왕이라고 해서 당시 중국에서 크게 추앙받았는데,

인도 굽타풍의 감각적 불상들이 아육왕 불상으로 일컬어지면서 당대 불상 패션을 선도하게 된 거죠.

 

5~6세기 남북조 시대 양나라 무제를 비롯한 제왕들이 왕권 강화를 위해 아육왕상과 아육왕탑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옆에 딱딱한 두루마기 차림의 전시기 중국 불상이 보이죠?

비교하면 확실히 더 세련되어 있죠.”


인간의 온기까지 느껴지는 아육왕상의 매혹은 양나라로부터 승려와 불상 등 불교 문화를

수입했던 백제와 신라의 불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을 터다.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공예사)는 “인도에서 직접 영향받은 중국 남조 불상이 황룡사 터의

장육존상에 어떤 경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쓰촨성 청두/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기사원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0551.html


 

베트남의 아육왕상(장육존상)

 

 

신라 황룡사 불상 미스터리 풀리나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1500년 전 황룡사 장육존상
베트남 아육왕상식 불상과 양식·금동 재질 등 유사…황룡사 복원에 희소식

 

 

신라시대 최대 사찰인 황룡사(黃龍寺)에 안치된 불상은 어떤 모습일까.

황룡사9층목탑을 비롯한 사찰 규모와 가람 배치 등은 그동안의 연구작업과 첨단과학기법 등에 힘입어

대략적인 윤곽은 드러났지만 정작 이곳에 모셔진 부처님상은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1500년 전 이 황룡사에 있었던 불상과 같은 양식의 석가상이 확인됐다.

양식은 물론 재질도 동일한 금동이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화제의 석가상은 현재 '베트남 유물전'을 열고 있는 부산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높이 29.4㎝의

아육왕상(阿育王像)식 불상.

이 불상의 특징은 두 어깨를 덮고 있는 가사의 옷주름이 U자형으로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사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전통적인 불상과는 복장 양식이 사뭇 다르다.

 

아육왕은 BC3세기 고대 인도 최초 통일제국을 이룬 아소카왕의 한자식 표기.

아소카왕은 팔만사천의 절과 팔만사천의 보탑을 세우는 등 불국토(佛國土)를 구현하려한 첫 임금이었다.

당시 유행한 불상을 그의 이름을 따 아육왕상식이라고 후대에서 부른다.

이 불상은 베트남의 고대 푸난(Funan·扶南) 왕조 시대 6세기 유물로 남부 메콩강 하류 삼각주 지역인 옥에오(Oc Eo)유적에서 출토됐다. 푸난 왕조는 1~6세기 인도와 중국 간 해상 교역으로 문화를 꽃피웠으며 옥에오는 지리적 위치상 당시 중심 항구였다. 인도 문화의 아시아 지역 유입 창구였음을 알 수 있다.

고고학계에서 황룡사 불상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이 이 불상 양식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대략 이렇다. 삼국유사 내용이 중요한 근거다. 진흥왕이 즉위 14년(553년)에 대궐을 지으려다 황룡(黃龍)이 나타나 이곳을 절로 삼고 17년 만에 완성했다. 얼마후 큰 배 한 척이 지금의 울산시 울주군 곡포에 닿았는데 이 배에 '서축(西竺) 아육왕이 황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배를 띄워보내니 부디 인연있는 국토에서 장육존상을 이루기 바란다'는 공문과 함께 부처상 하나와 보살상 둘의 모형이 실려 있어 이를 이용해 장육존상을 주조했다는 기록이다.

월인석보에는 아육왕이 보낸 이 배가 수백년간 바다위에 떠돌다 신라에 당도했다고 서술돼 있어

시차가 나는 까닭을 해명해놓았다.

 

 

 

학계에서 또 하나 주목하는 이유는 인도양식인 아육왕상식 불상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이웃 중국에서도

지금껏 확인된 적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남북조시대(220~581년) 남조에서 인도 문화 영향으로 이런 불상들이 만들어졌으나 대부분 목조상인 탓에 현재까지 유물로 전해지는 게 드물다는 것이다.

부산대 양은경(고고학) 교수는 "황룡사 복원프로제트가 그동안 기록만 있고 유추할 수 있는 자료들이 적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이 불상이 출토 유물이라 신빙성이 높는데다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어 황룡사 장육존상 복원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의뢰로 황룡사 복원프로젝트 중 불상부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황룡사는 신라삼보(三寶) 중 이보인 82m 높이 9층 목탑과 16자 크기(4.8m) 장육존상이 있었고, 새가 날아와 앉다 벽에 부딪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솔거의 금당벽화가 있던 곳이기도 했으나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안타깝게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현재 경북 경주시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황룡사 복원프로젝트를 시행해 내년도에 홍보전시관 성격의 연구센터를 세우고 오는 2035년까지 황룡사의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한편 부산박물관의 베트남 유물전은 오는 2010년 11월 14일까지 열린다.

 

원문

http://blog.naver.com/cjkim_1/10096922390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탑을 본뜬 높이82m의 경주타워이다

(2010년 5월 21일 방문때 찍은 사진입니다)

 

 

 

야간에 조명이 들어온 사진입니다 - 인터넷에서 펀사진

 

 

 

 경주 남산 탑골에 있는 부처바위다

삼면에 걸쳐 빼곡히 탑과 부처님상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다

 

경주 남산을 3번 방문하면서도 아직 가보지 못하여

이번 순례에서 시간이 났으면 가보았으면 했지만

둘째날 비가 오는 관계로 얘기를 꺼내지 못했었다

 

이 부처바위에 새겨진 탑이 바로 황룡사지 9층 목탑의 생김새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석불 우측에는 어디선가 낯이 익은 듯한 탑(왼쪽 사진)이 하나 있다.

모양새를 보니 석탑보다는 나무로 만든 목탑(木塔)임을 짐작케 해주는데,

2중 기단 위에 탑을 올린 형태는 신라 탑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게다가 탑의 층수를 세어보니 딱 9층이다. 9층목탑하면 딱 떠오르는 것은?? 그렇
다 바로 신화 속으로 사라진 황룡사(皇龍寺)의 9층목탑이다.

 

 

 

 

 

황룡사 목탑은 진흥왕(眞興王)부터
선덕여왕 시절까지 무려 93년(553~646년)동안 조성한 높이 224척(약 74m)의 장대한 탑이다.


주변 9개의 나라(당나라 등의 중원왕조, 왜국, 말갈..)를 부처의 힘으로 누르고 싶었던 약소국
신라의 의지와 그들의 천하관(天下觀)이 고스란히 담긴 이 탑은 유감스럽게도 1238년 고려를 침
범한 몽고에 의해 전소되어 지금은 터만 남았다

 

비록 800년 전에 한 줌의 재
로 사라졌지만 부처바위 한 쪽에 그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목탑이  남아 목탑의 전모를 헤아
리게 해주며, 지금 한참 구상중인 황룡사 목탑 복원프로젝트
에 커다란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지금은 이 땅에서 사라진 신라 목탑의 형태를 알려주는 소중한
열쇠이기도 하다. 탑 꼭대기에는 온전한 모습의 상륜부(相輪部)가 있으며 탑신의

추녀 부분에는 풍경까지 달려있어 바람이 부는 날에는 풍경소리가 잔잔히 울려퍼질 것만 같다.

 

 



석불 좌측에도 또 다른 7층목탑(오른쪽 사진)이 있다.

탑의 모양은 우측 9층탑의 축소판 마냥 비슷하며 2중의 기단 위에 탑을 얹힌 형태이다.

두 탑 아래로는 천마총(天馬塚)에 그려진 천마(天馬)와 닮은 듯한 사자<혹은 용마(龍馬)> 2마리
가 새겨져 있다. 이들은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존재로 9층탑 밑의 사자는 털이 없어서 암사자로
여겨지며 꼬리가 무려 3갈래에 이른다. 7층탑 밑의 사자는 꼬리가 복잡하고 머리 부분이 
양처럼 털이 복스러워 숫사자로 여겨진다.

 

 

 

기림사 약사전의 내부사진

 

 

 

 

 

 

기림사 약사전

 

 

 

 

 

 

 

좌우 협시 보살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계신다 - 펀사진

 

 

 

능지탑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 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사합니다. 관오 이상용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