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10 1편 부처님오신날 문경 봉암사
110510 1편 부처님오신날 문경 봉암사
봉암사
김용사
대승사 묘적암
대승사 윤필암
대승사
불기 2555년 부처님 오신날
전날 부터 오락가락하는 비는 부처님 오신날 아침에도 계속된다.
올해는 일년에 한 번 부처님 오신날에만 산문이 열리는 문경의 봉암사를 향했다.
문경새재 IC를 빠져나오자
구름에 쌓인 산의풍광은 선계를 방불케 한다
희양산 자락의 바위산은 구름으로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봉암사를 5Km쯤 남기고선 안내하시는 경찰들이 아예 도로를 막아버렸다.
거기서 부터 도로를 따라 한켠에 주차를 하게 한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셔틀버스를 타라고 유도해준다
봉암사 오르는 셔틀버스를 타는 곳 건너편의 풍광
4Km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선 셔틀버스를 내린뒤 산문까지 남은 길을 걸어서 올라간다
구름이 휘감아 도는 봉암사가 있는 백두대간의 허리 희양산 자락은 그대로 선계다
약 1,100년 전 신라 헌강왕 5년에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께서
희양산 자락을 보고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절의 창건을 마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다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일대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조계종 종립특별선원 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산문을 닫은 이래 1년에 한 차례 ‘부처님 오신 날’에만 일반인에 공개한다.
평소에는 이곳부터 출입을 할 수 없다.
간 밤의 비에 불은 계곡물
봉암사 결사
지금부터 60년 전인 1947년 구산선문의 하나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청담,성철,
자운,보문,우봉스님들이 시작한 수행결사는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일으킨 획기적인 불사였다.
당시 한국불교는 조선의 억불정책과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하여 불법의 쇄락과 근본정신이
퇴색한 바 이를 바로 세우고자 "부처님 법대로" 라는 정신으로 봉암사 결사를 추진하였다.
이 "부처님 법대로"의 봉암사 결사 정신은 이후 승단 정화운동과 조계종단 재건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도여전히 계승 심회시켜야 할 원력이 되었다.
봉암사 올라가는 길
1947년 가을에 청담,성철,자운,보문,우봉스님이 봉암사에 "부처님 법대로" 공동 수행하자는근본방침을 세우고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분들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한 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으로 공동 수행을 했다.
이에 공감하여 향곡,월산, 혜암,법전, 성수,법웅,보안,보경,지관스니등 삼십여명의 스님들이 점차 동참하여 수행 분위기는 더욱더 무르익어갔다. 결사에 동참을 원한 비구니 스님들은 백련암에서 정진하였다.
당시 봉암사 공동 수행 대중들은 대중공사를 열어 '공주(共住)규약'을 정하고 실천하였다.
---삼엄한 불계와 숭고한 조훈을 근수역행하여 구경대과의 원만 속성을 기함.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 교칙 이외의 각자 사견은 절대 배제함.
---일상유공은 자주자치의 표식하에 운수 종전, 파침, 탁발 등 여하한 고역도 불사함.
---작인의 세조와 신도의 특탁에 의한 생계는 이를 단연 청산함.
---가사는 ..... 괴색함.
---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에 취함.
---포살대계를 강송함.
등 열여섯 가지 청규를 정하고 만약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방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공주(共住)구약은 부처님의 교법을 일상에서 복원하려는 스님들의 수행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부처님 법대로"의 방향은 조선불교 이래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훼손된 불교정신을 바로
세우겠다는 수행자들의 본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한 자급자족의 원칙을 세우고,
고역(苦役)수행하며,소작인의 세조 및 신도의 특별 보시를 거부하였다.
이는 스님들 스스로 노력으로 결사 수행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보조 장삼과 괴색 가사를 착용토록 하여 복식에서도 수행자의 위의를 되찾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규칙적인 노동,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등의 연구를 통해 정기적인 포살등도청규에 반영하여 실천하였다
신도들도 스스로 불공하게 하였고, 평등 대중공양을 실천토록하고, 의식을 간소화하여
재(齋)중심 불교에서 수행중심 불교로 나아가도록 가르쳤다.
나아가 신도들에게 '보살계'를 설하여 수계의식을 거치게 하고 승보에게 삼배하는
예법을 되살렸다.
봉암사 결사를 계기로 승풍이 진작되면서
스님들을 삼보로 예경하는 법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이 봉암사 결사는 이전의 부처님 법에서 멀어진 잘못된 불교계의 관행과 폐습을
일거에 혁신한 하나의 '혁명'이었다.
더 나아가 보조 장삼과 괴색 가사의 복식 정비와 [금강경].[반야심경]의 독송의식,
신도의 스님들에 대한 예경법 정립 등을 통하여 수행자로서의 자부심과 위의을 갖추게 하여
불교의 위상 제고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봉암사 결사에서 만든 의식, 의례, 규칙 등은 이후 조계종단의 관례로 정착되어 갔다.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
봉암사 남훈루
봉암사에서 계곡 바로 건너 조금 올라간 길에 있는 마애불을 먼저 뵈러간다
계곡 건너편에서 본 봉암사 전각들
봉암사 마애불 올라가는 길
희양산 백운대에 위치한 마애보살좌상 전경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몸체는 가는 선으로 바위에 새겼다.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가 오는 탓에 예경하는 자리 마련과 보시함 보호를 위해 비닐 초장을 나무에 묶어 마련해 두었으나
이 배려가 일년에 한 번 모처럼 매애 보살상을 친견하러 온 이가 보기에는
마애보살상 가운데가 비닐조각으로 가려져 있어 약간 답답함을 준다
비닐초장을 조금 떨어진 다른 나무에 만들었어도 좋았겠고
아니면 비가오는대로 합장반배를 할 수 있으니 없어도 좋았겠다
이런 사실을 알려드려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말하지 않는 대다수의 다른이들처럼 그렇구나 하고 마는 것이 좋은것인지
아니면 배려하신 분의 마음을 헤아려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그려려니 하고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은지....
마애보살상을 가로질러 묶어놓은 비닐조각으로 인해
조각된 보살상의 전모를 다 볼 수 없는 사실로 인해
한꺼번에 여러 생각을 일으킨다.
희양산 백운대 지구의 기암 괴석들
백운대 계곡을 따라 더는 희양산을 오르지는 못한다.(통제구역이다)
가려진 비닐로 인해 비닐천막 안쪽에서 겨우 보살상의 전체를 찍어 보았으나
각도가 잘 나오지는 않는다
봉암사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마애보살좌상을 참배하고선 다시 봉암사로 내려와 남훈루를 통해 들어간다
남훈루를 들어서면 보이는 대웅보전
봉암사 대웅보전
아울러 봉암사는 전통적으로 연등을 백등으로 제작하는데
수행 할 시간도 모자라기에 언제 연잎을 만들겠으며 또한
영가 등과 겸해서 하기 때문에 백등을 단다는 뜻도 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차별 없이 밝히기를 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백등은 저녁에 불을 밝히면 그토록 아름답게 꽃으로
피어난다 한다
전각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수많은 일반신도들이 참배중인 봉암사 대웅보전
봉암사 극락전 보물 1574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간간히 비가 오다가 그친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웅보전의 앞 마당을 빼곡히 채운 봉암사의 백등들
바로 정면에는 주 출입문인 남훈루의 뒤 모습이 보인다
대웅보전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137호) 과 적조탑비(국보 315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137호)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지붕돌이 조금 넓어 보이기는 하지만 안정감이 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 (국보 315호)
보물 제138호였다가 2010년 1월에 국보 315호로 승격되었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이러한 가치로 보물 제138호였다가 2010년 1월에 국보 31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조사전
조사전
조사전 옆에 위치한
봉암사 선방으로 통하는 묘유문( 다른 한쪽에는 진공문이 있다)
모든 것이 본질은 진공으로 실체가 없으되 묘유로써 존재하는(거짓되이 존재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문들이다
희양산문 태고선방
묘유문을 통하여 보는 봉암사 선방
금색전
대웅보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정면에는 금색전이라는 현판이
후면에는 옛날의 현판인 대웅전이 그대로 달려있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봉암사 금색전
봉암사 삼층석탑이 대웅보전 마당이 아니라
금색전의 앞마당에 위치한 이유도 봉암사의 초창기 때 금색전 자리가
대웅전인 금당터 였을 것으로 추정하기에 충분하다
금색전의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님
봉암사 삼층석탑(聞慶 鳳巖寺 三層石塔) 보물 제169호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범종각
왼쪽의 금색전과 앞마당의 봉암사 삼층석탑
남훈루와 나란한 위치에 서 있는 요사채 건물
이 건물의 툇마루에 앉아 봉암사의 금색전과 희양산을 바라보는 풍광은 봉암사의 압권이다
요사채와 나라히 서 있는 남훈루의 옆모습
한가득 핀 철쭉이 경내에 가득하다
요사채 건물의 툇마루에 앉아서 보는 금색전과 봉암사 삼층석탑
요사채 건물의 툇마루에서 보는 봉암사 전경
왼쪽이 범종각이고 가운데가 금색전이다
금색전 뒤로 희양산의 바위 봉우리는 비구름이 만들어낸 안개에 휩싸여 있다
시시각각 구름이 변하여 ..
아예 마음을 넉넉히 잡고 봉암사에 한참을 더 머물러면서
구름이 걷힌 희양산의 봉우리를 보고 봉암사를 떠나고자 건너 요사채의 툇마루에 한참을 앉았다
아침 8시에 봉암사에 도착하여 벌써 11시 30분이 다 되어서 점심 공양을 하기로 공양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봉암사 선열당
대중들의 공양을 위하여 선열당을 열어주셨다
선열당에서 공양중인 대중들과 선열당의 용상방
점심공양을 하고선 다시 봉암사를 한 바퀴 돌아본다
극락전으로 바로 오르는 계단
내가 조금전 한참을 앉았던 금색전 건너편의 요사채 건물
요사채 건물의 툇마루
요사채 건물의 툇마루에서 보는 금색전과 삼층석탑
구름이 조금 걷히면서 금색전뒤로 희양산의 암봉이 조금 드러난다
구름 걷힌 희양산 암봉과 봉암사 금색전 전경
희양산의 암봉이 보이는 봉암사의 기가막힌 전경을 바라 보면서
이틀전인 2011년 5월 8일 108일을 작정하고 시작한 하루 매일 50분의 삼일째 기도를 했다
(천수경-이산혜연선사 발원문-반야심경-화엄경 약찬게-법성게-보왕삼매론까지 25분이 걸리고
광명진언,관세음보살정근 10분 - 금강경 독송 몇 품씩 15분)
(이 글을 쓰고 있는 7월 11일 현재 65일째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기도를 끝내고선 다시 경내를 한 바퀴 돌 요량으로
범종각으로 올라가는 길
금색전 맞은편의 봉암사에서 제일 좋은 전망을 볼 수 있는 요사채와 앉아 기도하였던 툇마루
남훈루 옆 모습
대웅보전 앞 마당의 백등
대웅보전 앞의 관불의식
봉암사 대웅보전 앞마당의 관솔대
나뭇가지등을 올려놓고 밤에 불을 피웠다
봉암사를 나오며
딱히 머무르는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봉암사의 기운와 운치에 반하여
아침 8시에 도착하여 다시 산문을 나서는 지금 시각은 오후 1시가 가까워 온다
비가 그친 오후 1시쯤 봉암사를 올라오시는 분들도 꽤나 많았다
차를 세워두고 셔틀버스를 타고 온 것이 얼마되지 않는듯 하여
셔틀버스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걸어서 내려왔더니
그사이 버스가 두어번 왔다 갔다하여 기다리던 사람들을 전부 실어 내려오고
길은 생각보다 꽤나 멀어 거의 한 시간을 걸어 겨우 차에 도착하였다
2편 문경 김용사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