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26-27 2일째 경주 성지순례06 석굴암
아침 6시 30분 숙소에서 출발하여 경주 토함산 석굴암으로 향했다
세계문화유산 석굴암 석굴
토함산(吐含山) 석굴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탈해는 한편 토해라고도 하여 토해와 토함은 유사음으로
토함산이 되었을 거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견해는 토함산의 경관이 안개와 구름을 삼키고 동해의 습기와 바람이 워낙 변화가 심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사납게 굴다가도 안개와 바람이 걷히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름다운
소나무와 산 봉우리가 한 폭의 동양화 그림처럼 나타나게 되어 동해 바다의 잔잔한 수평선 위로
해가 가득 떠 오르고 붉은 태양이 토함산을 넘어 갈 때의 전경이 마치 토해낸다할 정도로
그 변화가 심해 지명이 되었다는 설이 유래되고 있다
모쪼록 동해의 해를 머금은 기운이 부처님 광명으로 발현되는 뜻의 산이름이다
여기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위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월 말이라 계곡엔 잔설이 남았다
어제 밤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사방은 운무가 가득하다
위로 보이는 석굴암 석굴
석굴암(石窟庵)은 대한민국 경주시의 토함산 중턱(진현동 891)에 위치하여 있는 석굴 사찰(石窟寺刹)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불국사를 대대적으로 증수할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이 반영되어 있다.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로 석굴암으로 불리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며, 1913년 이후로 일제가 수차례 해체·조립·수리하기 전까지는 원형을 유지하였다. 현재는 부실 복원에 따른 습도 문제로 유리벽으로 막아 보존되고 있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구조
굴내(窟內)는 둥근 평면이며, 천장은 궁륭상(穹隆狀, 반구형 또는 아치형) 석굴을 짓고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 동쪽을 향하였고, 좌우의 너비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이
며, 그 앞에 장방형의 전실(前室)이 있다.
석불사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은 흰 화강석에 조각한 것으로, 높이 약 3.4미터,
석굴 중앙의 연화좌(蓮花座) 위에 부좌(趺坐)하였고, 수법이 정교하며 장중웅려(莊重雄麗)한 기상이 넘치는 매우 보기 드문 걸작이다.
본존 뒷벽에 반육각(半六刻)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의 원만한 자태는 신라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석굴 벽면에 십나한(十羅漢)·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을 반육각하였고, 벽의 윗부분에는 10개의 불감(佛龕)을 만들어 그 속에 1체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과 7체의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그 중 두 개만은 지금 비어 있는데, 대한제국 때 일본 사람이 반출하였다고 전한다.
천장은 궁륭상(穹隆狀)으로 되었고 중심에는 연판(蓮瓣)을 새긴 둥근 돌로 눌러놓았는데, 그
교묘한 구조와 우아한 조각은 놀랄 만하다. 입구 비도(扉道)의 좌우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각 2개씩 반육각하였으며, 그 앞 전실 양쪽 벽의 인왕(仁王) 및 팔부신장(八部神將)은
내부의 것에 비해 그 수법이 정교하지 못한 듯하다.
즉, 내부에는 여러 불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입상이,
비도 양쪽으로는 사천왕상이, 그 바깥쪽에는 금강역사가 놓여 있다.
본존불 윗쪽으로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가운데 8개에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을 오르내리는 양쪽의 길 옆에는 일제때 복원하고 버려진 석재들이 산재해있다
새로운 부자재로 바뀐 돌들이 그 임무를 다하고 쉬고 있는 것이다
이 중 대체되지 않은 석물도 발견되어 그 용도에 대해 궁금증을 남기고 있는 석물도 있다고 한다
역사
《삼국유사》에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한 불국사와 함께 전생의 부모를 위한 석불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서 불국사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점을 참작하여 석불사가 현재의 석굴암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불사에는 신림(神琳)·표훈(表訓)의 두 성사(聖師)를 각각 청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한다. 그 뒤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 중수하거나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고, 정선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석굴암 전실
(펀사진입니다)
본존불:
기단 상대석 폭 272㎝의 거대한 불상이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
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
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
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
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전체적인 얼굴 상은 안정감이 있으며 종교적인 숭고함을 띄고 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불교계의 주장은 전통적인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고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했던 황수영 박사의 아미타 부처님설은 7~8세기의 역사적인 사실을 추정해서 당시 세워진 본존 부처님 대부분이 아미타 부처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 했던 신현숙씨의 경전적 해석, 특히 석굴암 만다라설은 본존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일 가능성에 대해 더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석굴암에 계시는 보살님의 배려로 스님께서 유리벽안의
본존불 앞에서 집전하시고
도반들은 유리벽 밖에서 예불을 올렸다
1.사라진 5층 석탑
1909년 가을. 일제 식민통치의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가 초도순시차 경주 방문
시 석굴암 11면 관음보살 앞에 있던 5층석탑 밀반출. 일본인 모로가, 야나기 무네요시,
나카무라 등도 밀반출 사실 기록.
2. 8부신중 八部神衆 팔부중, 천룡팔부, 전실의 좌우에 배치됨.
전실에 들어서서 좌우 양 벽에 각각 4구의 상이 있는데, 그것은 팔부신중 혹은 천룡팔부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권속 또는 불교를 수호하는 신중들의 조상이다.
좌측
<아수라 · 긴나라 · 건달바 · 나가>
아수라-3면의 얼굴, 6개의 팔, 옷주름은 가벼운 천
긴나라-악사, 군복, 삼차극 무기. 머리 기름
건달바-머리위에 사자, 가슴에는 밧줄
나가-바람의 신, 머리에 용, 왼손에 보주
우측
<가루다 · 마후라가 · 야차 · 데바>
가루다-두터운 옷,신발 입상,삼지창, 귓가의 날개모양
마후라가-검,군지를 들고 있음.
야차 – 두광은 화염, 가슴에 수인
데바- 뱀 상징. 땅속의 마귀 진압. 칼, 왼손바닥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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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루라 : 두터운 옷을 입고 신을 신었는데, 왼손에는 삼지창을 쥐고 있고, 두 귓가에는 새의 날개 모양의 것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상에 비해서 훨씬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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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건달바 :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에는 군지, 즉 깨끗한 물을 담은 그릇을 들고 있다.
이것은 건달바가 천상에서 지키는 소마의 영약을 담은 그릇으로 봄이 타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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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천 : 머리 위에 화염을 표시하고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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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마후라가 :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은 가볍게 구부러진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손의 모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복행, 즉 배를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생태를 표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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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아수라 : 머리와 발 부분이 없어진 형태로 있으나, 삼면육비(三面六臂 : 세 얼굴 여섯 개의 팔)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고, 옷은 아수라의 특징 그대로 별달리 ?은 것이 없다. 다만 가볍게 부분적으로 천을 감고 있을 뿐이다. 배에는 악귀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악귀를 정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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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긴나라 : 머리를 기르고 단정하게 서 있으며, 왼손에 삼차극을 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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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야차 : 머리 위에 사자를 이고 있고 가슴 밑에 밧줄을 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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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용 : 머리 위에 용을 이고 있고 왼손에는 구슬을 쥐고 있다. 용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된 신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 신라에서도 매우 중요시되었고, 호국의 선신으로도 간주되어 왔다. |
3. 사천왕상 : 전실과 주실 통로의 좌우 벽
전실 입구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앞에 남방 증장천왕, 뒤쪽에는 서방 광목천왕이 배치
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앞에 북방 다문천왕과 뒤쪽에 동방 지국천왕이 배열되어 있
다.
이들 사천왕은 모두 악귀를 발로 밟고 있는 형상으로 서 있는데,
동방천왕은 두 손으로 칼을 들고 있으며 입은 굳게 다물고 있다.
북방천왕은 얼굴을 북쪽으로 돌린 표현에 왼손은 옷자락을 쥐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보탑을 받침.
남방천왕은 검을 양손에 들고 동방천왕과 유사하나 발 아래에 있는 악귀의 모습이 업
드려 있는 것
서방천왕은 오른손은 가슴께에 두고 왼손은 검을 쥐고 있는 자세. 얼굴 부분 따로 제작
후대 보수
4. 천부상과 보살상 : 전실과 주실 통로의 좌우 벽
주실인 원굴에 들어서면 좌우의 천부상 다음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첫번째 안치된 부처님은 제석이며 그 반대쪽은 범천이다.
이 천부상은 모두 매우 사실적인 묘사에다 세련되고 우아한 작풍을 보인다.
천부상 다음으로 좌우 벽에 새겨진 보살상은 왼쪽이 문수, 오른쪽이 보현보살상이다.
문수보살상은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서서 몸을 굴 안으로 향하였다.
보현보살상은 왼손에 경권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져 있다.
천부상과 더불어 이들 보살상은 석굴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의 제2상은 그 오른손에 범협(梵莢 : 범어 경전의 묶음)을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흔히 보현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문수보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의 보현보살은 이 세상에서의 교화라는 그의 원을 계속 충실히 행함을 입증하듯이 손에 그의 행이 원만함을 상징하는 둥근 보발을 들고 점으로 보아 문수와 항상 한 쌍을 이루는 보현보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보살상은 한결같이 원형의 소박한 두고아을 지닌다.
머리에는 삼면의 보관을 썼고 귀와 가슴 등에 구슬로 된 장식이 달려 있다.
천의는 결코 욕심으로 점철되고 있는 현세의 불행한 과보속에 얽매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5. 10대 제자
석굴 후벽 중앙에 십일면관음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에 곧 이어서 각각 5구씩 나한(羅
漢) 입상을
배치하였는데, 그 중 왼쪽에 있는 십대제자상이다.
석가여래의 제자 중에서 이름이 높은 수제자 10인을 말하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각양
각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 나한상은 동양에서도 첫째로 꼽을 만큼 훌륭한 부조상
을 하고 있다.
긴 얼굴에 각기 다른 골상을 보이는 서구적인 모습의 이들 제자상은 모두 머리를 깎았
으며 큰 코에 야윈 얼굴을 하고 있다.
자세 또한 정면 또는 측면의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의상의 모양도 서로 다르다. 경권,
향로, 정병 등 각기 손에 들고 있는 것에도 차별이 있어 여러가지의 특색을 보인다.
6. 11면 관음보살 十一面觀音菩薩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바로 본존 부처님의 뒷면 둥근 벽의 중앙을 차지하고 똑바로 서
있다.
그 어느 조각보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석굴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존 부처님 바로 뒤
에 배치된
이 조각의 양식적 특성은 무엇보다 머리 위에 작은 아홉개의 얼굴이 있고 그 위에 다시
한 관음이 있어서 본체와 합하여 십일면이 있는 관음 보살님이란 점이다. 긴 몸에 섬세
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는 영락(纓珞)은 정교한 귀걸이나 목걸이 등과 더불어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7. 금강역사
석굴암 금강역사(金剛力士)는 석굴암 입구에서 주실로 들어가는 좌우에 자리잡고 있
다.
금강역사의 역동적인 자태는 이름 그대로 힘이 넘쳐 흐른다. 옷 매무시나 문양에서 보
여지는 정교함은 다른 석굴암 조각물과 비교했을 때 많은 차이점이 있다.
두드러지게 양각이 강조된 것은 전반적으로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상신과 하신의 구분된 의상은
근육을 더욱 강조하고 현실감을 느끼게 만든다.
8. 감실
석굴 주벽상의 위쪽에는 남북과 동으로 각각 5개의 반구형 감실이 배치돼 있다.
잘 조화되어 그 아름다움을 더한 이 감실은 동시에 공간의 확대효과도 느끼게 해주고
있다.
대부분 보살상인 이 감불좌상은 본존불의 바로 전방과 그 후방인 십일면관음상의 상면
만을 피하고
그 나머지 벽면에 배치되어 하늘과 땅과의 중간에서 이 석굴의 영광과 장엄을 찬미
하고 환희하는 것
같다. 조각 또한 주위의 벽에 있는 다른 여러 상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우수한 작품
이다.
석굴암의 종교적,역사적,예술적 가치에 대하여 또 일제의 훼손에 대하여 설하시는
문광스님
일제의 훼손
일본의 학자들이 1907년 우연히 석굴암의 존재를 전해 듣고 그들이 최초로 발굴한 것으로 오인,
석굴암 전체를 분해하여 반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주민의 반발에 부딪혀 무마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석굴암이 훼손되어 무너지기 쉬운 위험한 상태라 판단, 1913년 ~ 1915년에 모두 해체하여 돌
사이와 천정 바깥쪽에 시멘트를 발랐다. 그 뒤로 결로현상이 발생하여 1920년에 중수를 시도하였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처음 해체·복원한 뒤로 원형이 훼손되었다.
당시,일제가 석굴암을 발견했을때는 보존불상에는 부처의 이마의 솜털을 표현하기 위해 보석이
박혀있었으며, 바닥을 차갑게해 습기를 아래로 모이게 하기 위한 감로수가 흘렀다.
일제는 보석을 훔쳐가고, 또한 신라인들의 지혜를 모르고 감로수를 석굴암 밖으로 빼돌려 버린다.
일제는 이를 복원공사라 하며 끝마쳤다. 그러나 시멘트를 바르며 환기구멍들을 모두 막아버리고
감로수를 밖으로 빼돌렸기에 석굴암에 습기가 끼기 시작해 석굴암 벽면에 물이 맺히고 이끼와 곰팡이가
끼기 시작한다. 일제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벽면을 부수고 유리창을 설치했으나 상태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광복후,1960년대 한국정부는 석굴암을 복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위에 시멘트를 더 덧발라버린다.
그후 석굴암 벽속에 온풍기와 에어컨을 설치해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고,겨울에는 온풍기를 틀어 습기조절에는 성공하였으나 기계의 소음때문에 석굴암에 미세한 금이 가고있는 상태다.
KBS에서 방영했던 역사스페셜의 석굴암 원형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에서 발견한 한 책자에 석굴암의 옛 사진이 발견되었는데
1909년도에 일제가 무너진 석굴암을 재발견할때의 사진이라고 한다
이때의 사진에서 보는 석굴암의 원형(왼쪽)이 현재의 상태(오른쪽)과 다른 점이
많다고 한다
사진 왼쪽아래의 사람들은 당시 경주에 살던 현지인들이라고 한다
컴퓨터를 활용해 가상으로 원형으로 추정되는
석굴암속에 서있는 유인촌씨
신라인들이 만들어 놓은 석굴암은 입구가 다소 무너지긴 했지만
전각이 없었던 걸로 보여 통풍이 원활하여 결로현상이 생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로 된 전각이 애초에 있었다면 있어야할 돌속의 8개의 기둥받침 흔적들
하지만 애초에 나무전각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논란
문화재로서의 원형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복원한다고 훼손되었기 때문에,
그 본래의 모습에 대한 논란이 있다.
- 광창 - 석굴암 본존불 앞쪽 천장에 조명을 위한 구멍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 비어 있는 감실 - 비어 있는 2개의 감실에도 불상이 있었는데 반출되었다는 주장이다.
- 목조건물 - 석굴암 굴 앞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주장이다.
- 채색 - 석불에 채색을 했었다는 주장이다.
어쨌던 더 많은 고증이 이루어져 위대한 신라인의 세계적인 불교문화유산이 원형대로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석굴암을 내려오면서 만나는 법당
석굴암의 옛 석물들
세계문화유산이니 찾아오는 사람들도 세계각지의 사람들이다
세계 각 나라의 글씨들로 적혀진 기와불사
석굴암을 내려오면서
석굴암 통일대종
맑은 날 석굴암에서 내려다 보면 보인다는 경치를
오늘은 운무가 싸여 그려진 그림으로만 보고 내려온다
아침 먹은 고려한식당
따뜻하면서 시원한 무우콩나물 해장국과 맛깔스런 밑반찬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아침에 석굴암으로 출발하면서 섭외한 아침식당이 준비도 철저하고 맛도 아주 그만이다
준비하시고 진행하시는 임원분들의 노고에 그저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7편 참고자료 서울 보문동 보문사 석굴암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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