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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26-0803 실크로드 04 돈황 막고굴

관오덴짱 2014. 1. 4. 20:59

080726-0803 실크로드04 - 돈황 막고굴

 

 

 

 

돈황산장호텔에서 1박을 하고선 다음날 돈황 명사산 끝자락에 위치한

돈황의 막고굴을 보러갔다

 

 

 

 

돈황의 막고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기념물들

 

 

막고굴 앞의 부도탑들

 

 

막고굴 정문

 

 

 

막고굴 莫高窟

모가오쿠( 莫高窟 막고굴: mò gāo kū,  둔황 석굴 )은

중국 간쑤성 둔황에 있는 대표적인 천불동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다.


중국 간쑤성(甘肅省) 서부에 있는 도시인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석굴군.

 


둔황(敦煌)은 고대 동서양 교류의 요지로 실크로드로 가는 통로였던 곳이다.

 

기원전 11년 한나라 무제가 이 곳의 흉노를 무찌르고 동부에서 한족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그 후 동서양의 문물이 교차되고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이곳 둔황을 거치면서 독특한 둔황의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특히 당대 7세기부터 8세기 중엽에 걸쳐 가장 왕래가 성해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며 세계적인 '둔황예술'을 창출했다.

 


특히 둔황은 '막고굴(莫高窟)'로 유명한데, 1900년에 발견된 막고굴은 명사산(鳴沙山)

동쪽 절벽에 남북으로 약 1.8㎞에 걸쳐 조성된 석굴군이다. 일명 천불동으로 불려지는

막고굴의 석굴은 약 1천여 개. 그 중 492개만이 발굴돼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492개 동굴마다 빈틈없이 그려진 벽화들로 해서 동양미술의 뿌리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막고굴 벽화의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신화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그 후 불교가 전해지고서는

석가의 선행, 열반상 그리고 사후 극락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막고굴에는 중국 문화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당나라 때 불상 중 걸작으로 손꼽히는

제45굴의 칠존상을 비롯해 제57굴의 보살 벽화, 제158굴의 열반상, 제285굴의 비천도 등이

주목을 받는다.

 

 

                   

                                                       45굴의 칠존상

 

 

 특히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려지는 제17굴은 송대까지의 경전이나 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바로 이곳 17굴에서 발견되었다.

 

 

16굴의 조사상

 

 

16굴의 조사상과 벽화를 해석을 위해 다시 그린 그림

 

 

16굴의 한쪽 벽이 무너지면서 발견된 17굴 장경동

 

 

벽면이 무너진 다른쪽 모습

 

 

 

훍벽이 무너지면서 우연히 발견된 제 17굴 장경동의 발견당시 모습




 

 

수 많은 문서와 함께 두루마리로 발견된 신라국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혜초스님의 천축국 기행때의 모습(상상도)

 

 

 

호북성 출신인 일자무식 왕원록이 막고굴로 온 것은 마흔 전후였다고 한다.

그는 막고굴을 관리하는 이들이 없는 것을 보고 스스로 관리자가 되어 청소도 하고,

시주도 받고 하는 식으로 지냈다고 한다. 나름대로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1900년 6월 22일 왕도사는 평소처럼 16호 굴을 청소 한 후 돌연 후면에

또 하나의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으니 그것이 장경동이다.


이 장경동의 보물의 가치에 대해 왕도사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새로운 발견을 관리에게 보고하고, 그들에게 아름다운 그림과 경전을 선물한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그 관리들도 보물의 가치를 몰랐으니 막고굴 장경동은 그렇게 외국으로 나갈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왕도사는 1907년 영국인 스타인이 오기까지 7년여 동안 장경동을 지켰고,

이 기간 관리들에게 선물로 준 것 외에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고굴의 보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자칭 탐험가들인 약탈자들이 돈황으로

몰려들었고, 그 보물들이 왕도사 손을 통해 빠져나갔다.


사실 왕도사보다 더 나쁜 이들은 스타인 중국인 통역사 겸 조수로 왕도사를 꼬시는데 앞장섰던 중국인 장효완 등이다. 그는 그 대가로 카슈가르의 영국대사관에 취직하게 된다.


지금 막고굴 매표소 앞에는 탑 모양의 왕원록 도사의 공덕비(?)가 서 있다.

1931년 왕도사가 죽은 후 그의 제자가 막고굴 천변 모래톱에 그를 묻고 탑을 세운 것이다.

이 탑은 공덕비라기보다 ‘불망비(不忘碑)’라고 부르는 게 옳다.

중국 정부가 그것을 없애지 않고 둔 것은 치욕의 역사를 잊지말자는 뜻일 것이기 때문이다.

 

 

막고굴의 최대 파괴자는 바로 장경동에서 경전을 훔쳐간 영국인 스타인, 프랑스인 펠리오, 일본인

오오타니, 러시아인 세르게이 올젠부르그, 미국인 렌던워너 등이다.

(이들 나라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반출되었기에 일부라도 현재까지 보존되었다고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또한 중국의 문화혁명시절 홍위병에 의해서 돈황의 석굴들이 훼손되었으나

지리적으로 오지에 속하여 그 피해는 심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인 펠리오에 의해 프랑스로 반출되어 프랑스 소유가 되었다

  

 

 

56굴의 벽화

 

 

 

 

217굴

 

 

237굴 유마경변상도의 동그라미내의 조우관은

신라인들이 썻던 깃털관이라고 한다

조우관을 쓰고 있는 사람은 신라의 사신으로 추정된다


돈황석굴의 수많은 굴과 벽화중에서 이 조우관을 발견하고

신라인으로 최초로 추정하여 글을쓰신 분이 우리를 안내하고 설명하여주셨다

이 굴의 벽화는 직접 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벽화를 영구보존하기 위하여 전혀 조명이 없는 깜깜한

어둠이 우리를 맞이한다. 설명하시는 분의 후레쉬 불빛이 없으면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천천히 후레쉬 불빞을  비추면 눈앞에 순간 신기루인듯 천년전의 벽화가 살아나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 엣날 실크로드를 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명멸한다 

 

 

254굴  교각상

 

 

259굴  전정불

 

 

 

328굴

 

 

328굴 보살좌상

 

 

328굴

 

 

384굴

 

 

417굴

 

 

420굴

 

 

428굴

 

 

428굴

 

 

439굴 가섭존자

 




 275굴 교조미룩보살상 - 교각상


석존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 즉 미래불. 미륵은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한 ‘maitreya’

음역한 것으로, ‘자씨(慈氏)’라고 의역되며 매황려야梅喤麗耶혹은 자씨보살로도 불린다.

 

원래는 유가유식학을 체계화한 실재했던 인도의 학승이었는데 '법상종의 교조'로 신비화되어 보살로 변신한 것이다. 석가불을 계승할 미래불로서, 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 《석가보釋迦譜》 《대지도론大智度論등에는 미륵이 인도의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가정에서 태어나 수도하였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미래불이 나타나서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사상이 싹틈에

따라 등장하였다.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등장하면서 도솔천이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 불교의 이상세계인 극락과 같은 비중을 차지하는 불국정토가 되었다.


 

도솔천에 계시는 미륵보살님이 하생하시려고 준비하신 모습의 불상입니다

미륵하생 불상


 

중국의 남북조(南北朝)시대에는 보살의 형태로 다리를 교차시켜 서있는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운강석굴의 담요오굴曇曜五窟가운데 제 18, 19, 20굴은 모두 미륵, 연등(燃燈) 그리고 현세(現世)의 삼세불형식을 위주로 하는 반면 제17굴의 주상(主像)만이 보살의 복장을 한 미륵교각상이다.


한국에서 삼국시대에 미륵반가사유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 이 도솔천에 머무르다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에 먼 미래를 생각하며 생각에 잠겨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한 ‘maitreya’는 또 한편 '메시아'라는 뜻의 어원입니다


 

2011년 3월 국립박물관의  실크로드와 둔황전에서 모형물을 찍은사진입니다


결가부좌에서 한쪽 다리를 밑으로 내린 형식을 반가좌(半跏坐)라 하는데, 삼국시대 미륵보살상의 자세로

많이 조상된 형식이다. 또한 의자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가지런히 내리는 의상(倚像:三花嶺石造彌勒三尊

本尊像)과 의상에서 두 다리를 교차시키는 교각상(交脚像) 등의 형식이 있다.


 

 

열반와불

 


 

 

 

 

 

 

 

 

 

 


 


둔황의 막고굴이 발견된 이후 당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이곳의 자료들을 가져갔으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가 가져갔다.



신라국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

 

 

 


한편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진 이후, 세계 각지의 학자들은 석굴의 벽화와 문서를 해독,

연구하기 위해 이곳 중국을 다녀갔으며, '둔황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날 정도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각 굴마다 299 300 301등의 번호가 적혀있다

공개하는 굴은 정해져 있으며 일반관람시에는 5개정도의 굴을 보게되고

조명은 없고 깜깜한 속에서 후레쉬 불빛으로 조각과 그림을 감상한다

 

 

 

사진기는 입장전에 맡기게 되어있으며 사진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특별관람을 신청하면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몇 개의 굴을 더 관람할 수 있다

 

 

 

 

 

 

 

 

 

 

 

 

 

 

 

 

 

 

 

 

 

 

 

엄청난 크기의 북대불을 모신 전각 외부

 

 

 

전각속에 모셔진 대불

(사진은 남대불 모습이다)

 

 

 

 

 

 

 

 

 

 

 

 

 

 

 

북대불 전각

 

 

 

 

 

 

 

 

 

 

 

 

 

 

 

 

 

 

  

 

 

 

벽화속의 그림들을 화려한 색감으로 재현한 그림들

 

 

 

막고굴의 조각상과 벽화의 그림엽서

 

 

 

 

비천도

 

 

 


 

 

 

 

 

 

 

 

돈황의 막고굴을 나오면서

 

 

 

돈황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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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크로드 천산북로 투루판에 있는 백자극리극 천불동 (2008년 7월 26일 탐방때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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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이 서라벌의 주산인  경주 남산에 이루고자 했던것은 바로 이러한 돈황같은 석굴 불국토였다.

경주 남산에 산재한 불상들은 당시 각각 전각이 있었고 채색되어 있어 남산 전체가 거대한 석굴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돈황, 트루판지역은 사암지역이라 동굴을 조성하기도 불상을 조각하기도 쉽지만

신라인들이 상대로 한 것은 화강암이었다.

 

조금이라도 잘못다루면 조각이 갈라지는 화강암 덩어리를 상대로 불상의  옷자락 선까지 선명하게

나타내 조각해낸  당시 예술의 극치!!!                

 

실크로드 문화의 종착지는 바로 신라의 경주였다.

 

 

 

중국의 장안에서 서역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지는 바로 신라의 서라벌 경주다

(2011년 3월 1일 국립박물관 '혜초와 돈황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도 전문가들의 평들은.

 

규모나 불상의 수로는 돈황의 석굴들이 압도적인 위압감을 주지만

불상의 예술적인 완성도는 석굴암의 그 것 하나에도 못미친다고 평가한다

 

 

                   

                                                    돈황 막고굴의    45굴의 칠존상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