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할애비강, 그 아름다운 新生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 만나는 곳… 한반도의 탯줄·젖줄·핏줄이 모여
天地人 어우러지는 그곳 '祖江'… 지금 南北 경계 돼 배 못 다니지만
제 몸 스스로 녹이는 성엣장처럼 분단 상처 지우는 봄날은 언제일까조선일보류화선 경인여대 총장입력2013.01.29 23:45
역사는 곧잘 강(江)에 비유되곤 한다. 어느 골짜기의 샘에서 시작해 바다에 이르는 동안, 강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결을 같이하며 흐르기 때문이다. 사실 강은 땅의 주름이 만든 '작품'이다. 땅의 눈물이, 땀이, 피가 흘러 강물이 된다. 지상(地上)의 시간이 모여 내와 천(川)을 이루고 다시 강이 된다. 그래서 강은 만남이고 언제나 시작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땅인 경기도 교하(交河)에서 태어난 나는 산보다 강에 더 가깝다. 늘 강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산은 경계를 나누고 구분을 짓지만, 물은 차이를 없애고 같음을 만든다. '고을 동(洞)'이라는 한자가 만들어진 이유다. 한강과 임진강도 차이를 없애고 같음을 만들며 오두산 절벽 아래에서 서로 팔짱을 끼고 서해로 향한다. 그러곤 곧 예성강을 품는다. 그곳을 고향 사람들은 '삼덕품'이라 불렀다. 삼덕품은 한반도의 탯줄과 젖줄과 핏줄이 어우러지는 혈(穴)이다.
↑ [조선일보]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세 강이 만나는 곳의 이름은 무엇일까? 한강일까, 임진강일까, 예성강일까? 셋 모두 아니다. '조강(祖江)', 즉 할애비강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가운데서 발원한 한강은 조국의 심장인 서울을 지나는 아비이고, 함경도에서 출발한 임진강은 남북의 아픔을 감싸 안은 어미이며, 개성을 지나온 예성강은 손자가 아니더냐? 아비와 어미와 손자를 모두 품에 안으니 할아버지인 것이다.
강화도는 할애비강에 의해 한반도의 배꼽이 되었다.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할 음모로 개명한 마니산(摩尼山)의 원래 이름은 마리산(摩利山)이었다. '마리'는 머리를 뜻하는 범어(梵語)로 우리말 '머리'의 어원이다. 마리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생명의 머리 터다. 이렇게 보면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이 펼쳐지는 장엄의 끝이자 시작은 한강의 풍백(風伯), 임진강의 우사(雨師), 예성강의 운사(雲師)가 만들어 낸 할애비강이다.
교하의 심학산에 올라 해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다. 해는 늘 삼덕품으로 진다. 석양에 할애비강이 붉게 물들면 북쪽의 연백 평야와 교하 벌판, 그리고 강 건너 김포 평야가 함께 붉어진다. 멀리 송악산과 북한산과 마리산의 세 꼭짓점이 석양빛에 우뚝하다.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이 어우러지는 삼각의 중심에 예서체로 '사람 인(人)'자를 쓰며 흘러가는 할애비강은 몽골에 대한 항쟁과 근대화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여성 대통령 시대다. 여성은 대지요 생명이요 강이다. 수도 서울은 한반도의 자궁 형상이다. 청와대 앞에 있는 경복궁도 남성인 좌(左)청룡보다 여성인 우(右)백호의 세(勢)가 강하지 않은가. 어머니는 품음과 베풂과 낳음이다. 품음은 통합이고, 베풂은 복지이며, 낳음은 발전의 원형이 아닌가. 그것의 형상을 할애비강에서 본다.
한겨울 할애비강은 한강과 임진강의 얼음장들이 떠내려와 성엣장으로 켜를 이루고 몸을 섞어 장관을 이룬다. 수천 년 동안 역사는 그렇게 흘렀고 쌓였고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나 봄이면 다 스러져 흔적을 지운다. 지금은 남북의 경계에 놓여 배가 다닐 수 없는 비경(秘景)의 할애비강에서 제 몸 녹이는 성엣장처럼 분단의 상처를 지워버리는 통일의 축제를 열 봄날은 언제일까? 이를 미리 노래한 서정주 시인의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기러기같이/ 서리 묻은 섣달의 기러기같이/ 하늘의 얼음짱 가슴으로 깨치며/ 내 한평생을 울고 가려 했더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풀리는 한강가에서').
누군들 예외가 있으랴마는 돌이켜보면 내 인생도 꽤나 강을 닮았다. 대학을 마치고 기업에서 시작한 사회 초년생 시절은 청량한 계곡의 맑은 물이었다. 방향을 틀어 언론에 몸담았을 때는 거침없이 흐르는 상류의 강물이었고, 도도하게 흐르는 중원의 강물일 때 나는 한 도시를 책임지며 새 물길을 텄다. 도시를 지나 하류의 평원에 도달한 강물일 때 바람맞이 언덕에 서서 레저 산업의 둑을 쌓았다. 이제 남은 길은 바다로 가는 일, 여기서 나는 할애비강을 만난다. 좋다. 홍익인간-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 아름다운 그 흐름을 따르리라.
강은 속으로 흘러 이음을 만든다. 죽음과 사라짐을 모아 생명을 만든다. 바로 아비의 핏줄이요, 어미의 젖줄이다. 평생 바쁘게 흘러 여기까지 왔다. 드디어 삼덕품,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이고 할아버지의 슬하다. 어찌 보면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움인가.
흐르는 것은 경계가 없다. 스스로 멈출 때까지 흐를 것이다. 작가 김훈 은 말한다. '강들은 이 헐거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소멸하는데, 먼 물들이 다시 이 하구로 당도하는 것이어서 조강은 모든 물들의 만남이고 해체이며 신생이다'('자전거여행'). 그래, 신생(新生)이다.
출처: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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