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130106 안성 청룡사 ,바우덕이 사당

관오덴짱 2017. 4. 6. 18:00

130106 안성 청룡사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기둥을 삼아 지은 대웅전이 있는 청룡사



청룡사[ 靑龍寺 ] 경기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서운산 瑞雲山 기슭, 노송 우거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청룡사는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기둥을 세워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대웅전으로 유명한 절이다.

 



입구에 위치한 청룡사 사적비


숙종 46(1720) 청룡사 중수를 마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사적비다.

높이 189, 73 이 비는 방형 기단석에 비신을 앉히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은 평범한 비석이다.


비문은 동현거사 나준(羅浚)이 짓고, 글씨는 중훈대부 직산현감 황하민(黃夏民)이 썼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김진상(金鎭商)이 전액(篆額)하였다.

 



청룡사의 내력은 숙종 46(1720) 나준(羅浚)이 지은 청룡사 사적비에 남아 있다.


1265(고려 원종 6)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공민왕 13)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서기가 가득한

가운데 청룡이 오르내리매 나옹선사가 이를 보고 절 이름을 청룡사,

산 이름을 서운산 瑞雲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공양왕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세종 6(1424)에 다른 곳으로 옮겼고,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원찰(願刹)로 사세가 확장되었다고 전한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절의 집자리가 마치 청룡의 형상과 같다고 한 데서

청룡사가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4호이다.

    



현재 남아 있는 당우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명부전, 관음청향각, 대방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9)이 있으며,

조선 현종 때 주조한 800근이 넘는 동종이 있다.














절 북쪽 관음전에 1680년에 조성된 감로탱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감로탱이라고 전한다.

  



대웅전 앞에 있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9)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지붕집으로 고려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다

대웅전 정면을 피해 양 옆으로 계단이 나 있다.




 청룡사의 전체 규모가 소박하고 아담한 데 비해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하여 웅장하고 다부지다.

대웅전이 서쪽을 향하고 있는 점도 예사 절과는 다르다






청룡사 대웅전 보물 제824.

대웅전의 건축시기나 중수된 내력은 확실치 않으나, 조선 후기 건축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의 사방 칸칸을 받친 큰 기둥을 자연목 그대로 썼음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이리저리 등 굽은 노송을 그대로 옮겨와 가지만을 뚝뚝 잘라내고 기둥을 삼은 것이 천연(天然)의 미감이다.

정면의 곧은 기둥과 달리 건물의 측면에는 굽은 나무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법당 밖의 채색도 눈여겨볼 만하다. 화려한 꽃과 연꽃문양들이 가득 차 있다.

문설주 위에는 석가모니불·비로자나불·약사여래 등 다섯 분의 부처님이 무언의 설법을 들려주고,

여러 모습의 조사(祖師)들이 다양한 근기根機의 참배객을 맞이한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청룡사 경내




대웅전 오른쪽 옆면



대웅전 양쪽 추녀 끝에 금강력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청룡사가 아니고선 결코 볼 수 없다.

오른쪽엔 입을 굳게 앙다문 밀적금강(密蹟金剛), 왼쪽에는 입을 벌린 채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천왕문이나 금강문을 따로 세우지 않은 청룡사는 법당 추녀에서 잡귀의 침입을 막고 부정을 다스리며 부처님을 외호토록 배치한 듯 하다. (관련사진 없음^^)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 좌우보처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다.

 



법당 한쪽에는 현종 15(1674)에 조성된 높이 128, 800근 무게의 향토유적 제26호인 동종이 있다.

 

    


나전(螺鈿) 당초문으로 치장된 화려하고 장엄한 대웅전 내부의 불단도 청룡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자랑거리다.

 

    


청룡사의 설명으로는 석가모니물과 좌우 문수 보현보살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시 한번 대웅전의 왼쪽면을 바라다 본다



























청룡사를 나서며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사적비의 내력을 뒷받침하는,

청룡사를 거쳐간 스님들의 부도비가 있다

 




 조선시대 석종이 단연 많고, 그 이전 이후의 부도도 더러 눈에 띈다.




청룡사가 유명한 또 한가지 이유로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민중놀이패 남사당의 근거지가

청룡사라는 점이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추운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信標)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10여 채쯤 돼 보이는 남사당마을과 청룡사는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남아있다.

 



남사당은 겨울이면 청룡사에 와 둥지를 틀고 일손을 거들며 식솔들을 거뒀다.

청룡사는 천대받으며, 어렵사리 생존을 꾸려가는 남사당에게 불목하니 등의 일거리를 제공하고

식솔로 받아들여 고단한 삶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다

 



청룡사 중수기에는 이들 남사당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들은 청룡사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불사에 시주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들을 보듬어 들였던 청룡사는 근엄함보다는 인정어린 따스함으로 다가온다.

 



바우덕이는 1910년부터 남사당패를 이끌던 여장부였다.

    


남사당에도 여자가 가세하게 되었는데, 안성 바우덕이는 전국에 유명했다. 경복궁 중건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고자 안성 사당패를 불러 걸판지게 놀이판을 벌였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와 춤, 줄타기는 일품이어서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전한다.


 

그런 사연에 힘입어서였을까. 1910년경 안성 남사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13년간 안성 바우덕이는 안성 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거리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 청룡리 개울가 어딘가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한다.

 

    


주변에 서운산, 칠장산, 미리내성지, 고삼저수지, 안성장, 삼일운동기념탑, 죽주산성,서일농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