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926-1004 독일일주 - 포츠담 상수시궁전
관광버스
상수시 공원의 독일 풍차
상수시 궁전 Schloss Sanssouci
독일 상수시 궁전에서만큼은 근심은 내려놓자
대왕으로 불린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안식처
자연미·단아함 넘치는 상수시 궁전
상수시 궁전은 브란덴부르크주의 주도(州都)인 포츠담에 있다.
베를린 남서쪽 경계에 있는 소도시 포츠담은 프로이센의 왕들이 가장 사랑했던 주거지였다.
포츠담은 곳곳에 강이 흐르고, 도처가 호수다. 하펠(Havel) 강을 비롯한 20여 개의 강과 호수가 도시를 감싸 안고 있다. 이곳에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왕들의 별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상수시 궁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규모는 크지 않고 단아하다. 가까이 다가가면 화려함에 놀라게 된다.
궁전을 돌아 앞으로 나아가면 정원으로 이어지는데,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특이하다.
좌우로 포도밭이 발코니처럼 놓여 있다.
이 궁전의 주인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Ⅱ·재위 1740~1786)다.
그는 프로이센의 왕과 독일의 황제를 통틀어 '대왕(대제 the Great)'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군주다.
1747년에 프리드리히 2세는 포츠담의 풍광에 반해 이곳에 베르사유 궁전을 바탕으로해 자신의
여름 궁전을 짓고 '상수시(Sanssouci)'라 이름 붙였다.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의미심장한 작명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삶은 근심이 없었을까? 아니면 이곳에서만이라도 근심에서 벗어나 쉬고 싶었던 것일까?
왕의 청년시절은 불행하였다. 어머니를 닮아 예술과 철학을 동경하는 '자유인'이었다.
하지만 '군인왕'이라 불린 엄격한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후발 제후국에서
유럽의 열강으로 발돋움하려는 신흥 강국 프로이센에는 강력한 왕이 필요하였다.
군인왕은 아들에게 군대식 규율과 질서를 강요했다.
그가 꿈꾸던 자유와 그에게 지워진 왕위 후계자로서의 책임이 공존할 수 없었다.
둘의 관계는 계속 악화됐고 공개적인 비난과 육체적인 체벌로 파탄에 이르렀다.
1730년 모욕으로 상처받은 18살의 왕자는 망명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됐다. 아버지는 아들 대신 이 계획을 도운 왕자의 친구를 처형했다. 프리드리히 왕자는 18개월 동안 감금됐다.
이 사건은 왕자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됐다. 프리드리히는 자유를 찾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이 주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했다. 그는 아버지와 타협하고 군사와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꿈도 받아들였다.
1740년 5월, 프리드리히는 28세의 나이로 프로이센의 세 번째 왕이 됐다.
그는 정치가와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이미 타고났다. 아버지가 갖고 있지 못했던 전략적 안목과
결단력, 용기도 갖췄다.
그해 10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카를 6세가 죽었다.
탁월한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의 국제적 지위를 바꿔놓을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 가운데 가장 산업이 발달하고 부유하며 전략적 요충지인 슐레지엔을 노렸다.
객관적 전력으로는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740년 12월,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전격적으로 슐레지엔을 점령했다.
주변국을 한편으로 끌어들이는 외교전의 승리로 슐레지엔 침공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규모가 커졌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제국의 나머지를 지키기 위해 결국 슐레지엔을 포기했다. 몇 년 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와 손잡고 복수전에 나섰다. 이른바 7년 전쟁이다.
하지만 자살용 독약을 품에 넣고 전쟁터를 누빈 프리드리히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요충지 슐레지엔을 차지하고 지켜냄으로써 프로이센은 단숨에 유럽의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프리드리히는 젊은 나이에 '대왕' 칭호를 얻었다. 전쟁을 끝낸 왕은 내정을 개혁했고,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전념했다.
언제나 일에 치여 살았던 왕은 상수시에서만큼은 짐을 내려놓고 싶어 했다.
사실 왕은 이 사랑하는 궁전에서조차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일에, 근심·걱정에 묻혀 살았다. 아내가 있었지만 사랑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다.
‘상수시 Sanssouci’ 는 프랑스어로 근심이 없다는 뜻으로
프리드리히 대제는 정무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개들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은신처를 원했다.
실내장식은 당시 유행하던 로코코 양식으로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게 꾸몄다.
프리드리히 대제의 스케치를 기본으로 만들어진 궁전은 단층으로만 만들어 졌으며
궁전 한가운데에는 대리석으로 꾸민 연회장과 그 옆으로 왕비의 방과 프리드리히 대제의 방과
콘서트 홀이 있으며 그 밖에도 회화관과 중국식 찻집 등의 건물이 있다.
상수시 궁전은 계단 모양의 포도원 위에 세워졌다
상수시 궁전의 정원
46년의 긴 왕 노릇은 상수시에서 끝났다.
긴 세월 동안 대왕은 행복했을까?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삶이 어찌
행복할 수 있을까?
프리드리히 대왕의 삶은 힘겨웠다. 상수시에서도 그는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대가로 프로이센은 활력이 넘쳤고 성장했다.
상수시로 가는 길은 감동적이다.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강대국으로 나아가려는 대왕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곳의 백미는 계단식 정원의 아래에서 본 상수시 궁전의 모습이다
프리드리히 2세(왼쪽)와 그의 묘지를 찾아가 경의를 표했던 나폴레옹
1806년 10월 25일
나폴레옹은 연이어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포츠담에 도착했다. 이제 곧 베를린으로 진군할 참이었다.
나폴레옹은 포츠담의 개리슨(Garrison) 교회 지하 묘지를 들러 평소 존경하던 프로이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2세의 묘지를 참배하며 경의를 표했다.
나폴레옹은 프리드리히의 로이텐 전투(1757년 12월)를 '이동, 작전, 결단이 낳은 걸작'이라며
"이 하나의 전투만으로도 프리드리히는 불멸의 인물이 되기에 충분하며 가장 위대한 장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극찬했다.
왕의 무덤은 지금은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다.
생전에 프리드리히 2세는 상수시 궁전의 정원을 최후의 안식처로 지정했다.
하지만 사후(死後)에는 본인의 뜻과 달리 개리슨교회의 지하에 모셔졌다. .
왕의 무덤이 본인의 유언대로 상수시로 옮겨진 것은 1991년 8월 17일, 그가 죽은 지 205년 만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 대왕은 이제사 근심을 내려놓고 마음껏 쉬고 있다
포도원 울타리 제일 꼭대기에는 프리드리히 대제와 그가 사랑했던 개들의 무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무덤은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우선 대왕의 이름이 적힌 작은 석판이 전부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언제나 무덤 위에 항상 감자가 놓여있는 것도 특이하다.
그가 오늘날 독일의 대표 식재료인 감자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대왕은 감자 농장을 건설하고 전국에 전파했다. 오늘날 독일을 '감자 나라'로 만든 사람이 프리드리히 대왕이었다.
국민의 먹거리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그를 프로이센 국민은 'Old Fritz'란 애칭으로 부른다. 옆에 자신이 사랑했던 애완견들의 무덤 9기가 있다는 점도 색다르다.
원용 글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19/2018071900011.html?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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