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418-29 11편 인도 사르나트 녹야원
2008년 4월 24일(목) 네팔과 인도 여행 7일째
오전 바라나시에서 겐지스강의 일출과 힌두교 목욕의식등을 보고선
바라나시에서 12Km 떨어진 불교의 4대 성지중 하나인
초전법륜(初轉法輪)지 사르나트(녹야원) 을 들렀다.
사르나트 박물관은 어제 저녁에 도착하여 이미 관람하였다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신후
같이 수행하다가 떠났던 5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펴기 위하여
보드가야에서 250여 Km 떨어진 바르나시 근처의 사르나트(녹야원)로 7일간 걸어서 오셔서
5비구를 다시 만났던 곳에 세워진 염불탑.
5세기경 굽타왕조가 세웠다.
하단부에 감실을 두르고 있는 이 스투파의 머리부분에는
팔각형의 붉은 3층 건물이 세워져있는 모양이다
사르나트의 입구에 위치한다
보드가야(부다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는 지도 상 거리로 250Km가량 된다.
그러나 부처시대의 옛길로 꾸불꾸불 걷게되면 이 길은 350Km길이로 늘어난다.
초전법륜지 사르나트(녹야원) 전경
5비구 란?
콘단냐(Kondanna:倧蓮如) 아사지(Assaji:阿說示) 마하나마(Mahanama:摩訶男)·
밧디야(Bhaddhiya:婆提) 바파(Vappa:婆頗)의 다섯 비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석가가 성도하기 전 함께 수행하였고, 성도 후에는 초전법륜(初轉法輪)의 설법을 듣고
최초로 석가에게 귀의하여 교단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본래 우다카(Uddaka) 교단의 수행자였다.
석가가 처음 출가하여 '우다카 라마푸타 '라는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떠날 때 석가를 따라 네란자라강[尼連禪河]까지 와서 같이 고행을 하였다.
석가는 5년 간의 고행을 한 후 고행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작은 진리를 터득한 후
'수자타'라는 처녀가 우유와 꿀에 쌀을 넣고 끓인 우유죽을 받아 먹었다.
덕분에 석가는 기력을 회복하였으나 그를 따라 수도하던 다섯 비구는 태자가 타락하였다며
실망하여 바라나시[波羅奈] 교외의 녹야원(鹿野苑)으로 떠나버렸다.
얼마 뒤 싯다르타는 보드가야(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선정에 들어 마침내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부다(Budda)가 되었다.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님은 그 법이 너무 오묘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법을 설하는 것을 포기하고 바로 열반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21일간 삼매에 들어 부처가 세상에 나온 인연을 살펴보신 후 자비심을 일으켜
법을 굴리기로(전법) 결심하고,
같이 수행하였던 다섯도반을 먼저 제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250여 Km가 떨어진 사르나트(녹야원)로 몸소 찾아가셨다.
멀리서 석가를 본 이들은 모른 체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석가가 다가가자
저절로 위의(威儀)에 압도되어 일어나 자리를 권하고 공손히 인사하며 법을 청하였다.
석가의 곁을 떠난 다섯 비구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수행자들은 고행을 최고의 수행 방법으로
여겼는데, 석가의 첫 깨달음은 극단적인 수행 방법을 부정하는 고락중도설에 의한 것이었다.
석가는 이들에게 쾌락만을 좇거나 고행만을 추구하는
양 극단을 뛰어넘어 중도(中道)를 배우고 행하라 일렀다.
그리고 생로병사의 고통(苦)과 그 고통의 원인(集), 이를 벗어난 평화(滅)와 그에 이르는 방법(道), 즉 고집멸도 사성제(四諦:四聖諦)와 그 수행 방법으로서의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즉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였다.
이어 무아(無我)와 12연기(緣起)법을 설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초전법륜이다.
그 설법은 듣는 사람의 혼에 죽비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5비구는 부다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어
부처님이 이들을 비구(比丘, 빅쿠)라 부름으로써 최초의 승려집단이 되었다.
이로써 불 법 승(佛法僧) 삼보(三寶)가 갖추어져 처음으로 불교교단이 형성되었다.
처음으로 법륜(법의 바퀴)이 굴려지고(전법륜) 불교(佛敎)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부처님은 49년간의 중생교화의 길을 걸으셨다
부처님은 생전에 8만 사천 법문을 설하였다.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묻는 말에 답하는 형식으로 그 존재가 성불할 수 있도록 설법하셨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이후 불교가 전 인도에 퍼지며 사르나트 또한 절대 성지중 하나로 추앙받았다
하지만 10세기 이후 이슬람의 북인도 침입이 본격화되며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면서
사르나트도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었다.
1835년 영국 왕립 고고학회가 사르나트의 발굴에 성공했지만
불교도가 전체인구의 1%도 남지않은 인도에서 사르나트는 모호한 위치속에 남아있다.
오히려 주변 불교국들이 세워 놓은 크고 작은 사원들이 불교성지 사르나트의 모습을 대변해주고있다
뒤로 커다란 다멕스투파의 모습과 녹야원 전경
오래된 스투파들과 앞에 새로이 복구된 스투파
사진 중간엔 쌓아논 벽돌 무더기들이 보인다
뒤로 사르나트의 상징이 된 크다란 다멕 스투파가 보이고
앞으로 넓고 낮은 단 처럼 생긴곳이 부처님의 최초 설법지인 다마라지까 스투파다
사진의 뒷쪽 스님이 앉아 계신곳이 부처님이 처음 설법을 행한 자리에 세운
다마라지까 스투파 다
다마라지까 스투파는 아쇼카대왕이 처음으로 스투파를 세운 뒤 무려 여섯번에 걸친 보완공사가 더해졌다
나중에는 높이가 30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까지 확장됐다고 하지만
현재의 모습에서는 당시의 위용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1794년에 바라나시의 마하라자(그 지역의 영주)가 자신의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벽돌을 해결하기 위해
어이없이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스투파 안에 봉안됐던 부다의 사리 함과 불상은 현재 꼴까따의 인도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아직도 일일이 손으로 벽돌을 다듬어 무너진 스투파들을 복구하는 작업을 하염없이 계속하고 있다
아쇼카 석주 가는 길
아쇼카 석주
기원전 249년(BC 3세기) 아쇼카대왕이 부다의 유적지를 돌며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웠다.
아쇼카 대왕은 인도 최초의 통일제국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연 인물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재위말년 성지를 순례하며 곳곳에 아쇼카 석주라고 불리우는 돌기둥을 세웠다.
이 석주들은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뒤 수백년이 지나
불교의 성지들을 재발굴하는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아쇼카 석주는 사르나트 외에도 부다의 탄생지인 룸비니,산치등 불교성지에 세워져 있다
전국적으로 세워진 아쇼카석주중 약 10 여개에는 왕명을 적은 조서도 새겨져 있어 인도 고대사를 밝히거나
마우리아 왕조의 영역을 파악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파괴되어 하단만 남은 사르나트의 아쇼카석주
무너진 아쇼카 석주의 상단을 장식한 사자상은 어제 사르나트에 도착하여 겨우 관람한
사르나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그림엽서의 사진을 올린다)
위 사자상은 인도의 문장에 등장하는 사자의 표본이 되었다고한다
사르나트 (녹야원 鹿野園 - 므리가다바 )
녹야원의 명칭의 유래는 부다의 전생과 관련된 전생담(본생담)에 나온다
때를 알 수 없는 과거에 사르나트 숲속에는 1천여마리의 사슴이 살았다.
이때 사슴떼의 왕이 바로 전생의 부다였다.
당시 바라나시의 마하라자는 사슴고기를 즐겨 매일 사슴 사냥을 하였다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사슴무리의 왕은 마하라자를 찾아가 그렇게 사슴고기가 먹고 싶다면
사슴들이 순번을 정해서 매일 한마리씩 죽을테니 사냥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슴들은 그날 이후로 매일 순번을 정해 한마리씩 죽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슴 중 한마리가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공교롭게도 새끼를 밴 사슴이었다.
자비심 많던 사슴 왕은 이 어미를 위해 자신이 대신 죽기로 결정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하라자는 자신이 사슴만도 못한 자비심의 소유자라는 걸 깨닫고
그 이후 사르나트에 있는 사슴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사르나트의 한자 이름은 녹야원 鹿野園 즉 사슴정원이라는 뜻이다
금당터
무너진 법당에서 3배를 올리고선..
나란히 도열한 스투파들
초기의 불탑은 위의 사진과 같이 전돌(벽돌)을 이용하여
사발을 뒤집은 모양의 복발탑 또는 봉발탑 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며 중국의 탑은 전돌을 이용하여 높이 쌓기 시작하였고
목탑의 형태가 출현한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초기에는 전탑( 예, 안동 신세동 전탑)이 유행하다가 목탑 (예, 황룡사지 9층목탑) ,
그리고 그만한 크기의 3층석탑이 만들어 지다가( 예, 감은사지 삼층석탑)
최종형태로는 크기가 줄고 비례감과 상승감이 최고조에 달한 화강암을 이용한 3층석탑이
통일신라시대의 고유형태의 탑이 되었다( 예 석가탑)
봉발탑들
다멕스투파
다르마 차크라 스투파라고도 불리우는 탑
부다가 다섯도반에게 처음으로 행한 설법인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스투파로
사르나트내에서는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지만
거대한 모습으로 사르나트를 대표하는 스투파다
지름이 28M 기단을 포함한 높이는 무려 33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11M까지는 큰 돌을 그 위부터는 벽돌을 쌓아 완성했다
거대한 다멕 스투파를 탑돌이 하시는 스님
탑의 하단은 마우리아, 상단은 굽타 양식으로 지어져 있어
막연하게나마 아쇼카 대왕시절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른 불교 유적과는 달리 이슬람의 침입 속에서도 온전히 보존되어 있더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다멕스투파 탑에 금박공양을 올리시며 기도하시는 스님
성지순례를 오신 다른 분들이 탑을 보며 법문을 듣거나 기도를 하고 계신다
다멕 스투파의 하단부의 문양이 이쁘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을 행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세운 다마라지까 스투파
2009년 가을 방문한 수국사 경내에 조성된 초전법륜의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
많은 법당의 외벽에 그려진 부처님께서 5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시는 장면을 그린
초전법륜 벽화
부처님이 최초의 설법을 하신 자리인 다마라지까 스투파를 보니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는
법음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극단이 있으니 출가자들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러 가지 애욕에 빠져 그것을 즐기는 것이니, 그것은 열등하고 세속적이고 범부의 짓이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짓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니, 그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 되는 바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원만히 잘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요함과 수승(殊勝)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눈을 뜨게 하고 앎을 일으키고, 고요함과
수승한 앎과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팔정도 八正道]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잘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여기에 성스러운 고제(苦諦)가 있다.
곧 태어남도 괴로움, 늙음도 괴로움, 병듦도 괴로움, 죽음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도 괴로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集諦)가 있다.
곧 재생(再生)을 유도하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여 이곳 저곳에 집착하는 갈애이다.
다시 말하면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滅諦)가 있다.
곧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道諦)가 있다.
곧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것이 성스러운 고제이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두루 알아야 한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성스러운 고제를 이미 두루 알았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집제를 이미 끊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멸제를 이미 증득했다’라는 ……
비구들이여, 나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성스러운 도제를 이미 수습했다’라는
예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법에 눈을 떴고 지혜가 일어났고 앎이 일어났고 광명이 일어났다.
비구들이여, 만약 내가 이 사성제(四聖諦)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沙門),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할 수 없다.
비구들이여, 나는 사성제를 이와 같이 세 번씩 열두 단계로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천신, 악마, 범천의 세계와 사문, 바라문,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높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훌륭히 성취하였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알고 보게 되었다. 나의 해탈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최후의 생존이니, 이제 다시 괴로운 존재를 받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가르침을 설하시자, 꼰단냐는 법안(法眼)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렸을 때, 땅의 신들이 소리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범천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땅의 신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사왕천(四王天)의 여러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서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야마천(夜摩天)의 신들도 도솔천(兜率天)의 신들도,
화락천(化樂天)의 신들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그 소리를 듣고서 범천(梵天)의 신들도 외쳤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서 가장 훌륭한 법륜을 굴리셨다.
이것은 사문, 바라문, 천신, 악마 등 세상의 어떤 누구도 굴리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순식간에 범천에까지 그 소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일천 세계(一千世界)가 격렬하게 진동했고,
신들의 위엄을 능가하는 한량없는 광채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을 읊으셨다.
“아, 참으로 꼰단냐는 깨달았구나.
이리하여 꼰단냐 장로는 그때부터 안냐 꼰단냐(Añña Kondañña)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로 안냐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가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안냐 꼰단냐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나머지 비구들에게도 교법을 설하셨다. 그때 밥빠(Vappa) 장로와 밧디야(Bhaddiya)
장로가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세존께서는 가져온 음식을 드시고 난 뒤, 다시 나머지 비구들에게 교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존과 비구들은 세 비구가 걸식해 온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세존의 교법을 듣던 사이에 마하나마(Mahānāma) 장로와 앗사지(Assaji) 장로가 먼지와 때를 멀리 여읜 법안을 얻었다. 곧 ‘모여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 소멸한다’고 깨달았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은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알았고, 법을 꿰뚫었다. 의심에서 벗어났고, 망설임을 제거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스승의 가르침 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들이 세존께 청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너라, 비구들이여. 내 이미 교법을 잘 설해 놓았다. 바르게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한다면 청정한 수행을 하라.”
두 장로는 이렇게 구족계를 받았다.
사르나트(녹야원)를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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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진
용인 법륜사의 계단에 조각된 법륜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의 문에 달려있는 전법륜
누구나 법륜을 돌릴 수 있도록 해놓았다
법륜은?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고정불변의 법이 아니다.
법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방편일 뿐이다. 법도 변한다. 법륜, 즉 법의 바퀴라고 표현한 것이 그런 의미다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의 법은 시대와 나라를 거치며 티벳에서는 티벳불교, 중국에서는 중국불교 ,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각각 고구려,백제,신라불교로 일본에서는 일본불교, 동남아에서는 동남아 불교로 법의 바퀴가 굴려졌다. 법의 바퀴는 이렇게 시대와 나라에 따라 거기에 맞추어 굴려지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는 히포크라테스가 의성(醫聖)이지만 그 시절의 의술로 현대의학에 맞출수는 없는 것과 같다
의학의 바퀴가 굴려지면 누구 누구 한사람이 히포크라테스 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람과 의술이 모아져 점차 근대 현대 의술로 발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시대의 초기불교는 법륜이 굴려지며 용수의 중론과 유식사상이 보태어 정립되고
중국에서 선불교와 화엄사상으로 신라에서는 원효의 화쟁사상으로 의상의 화엄으로 이어져
한국에서는 한국불교로 정립되기에 이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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갠지즈 강의 지류
확성기를 단 차를 타고 이동하는 무리
바라나시 공항
'세상에서 제일 빠른 인디언'
바라나시에서 비행기를 타고 카주라호로 이동한다
바라나시 공항경찰들과 함께
** 초전법륜의 내용은 전법룬경으로 전해오고 있다
초전법류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제(四제 사성제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設) 십이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생각되는 전승을 보면 쾌락과 고행 두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팔정도의 가르침과 사성제의 가르침이 초전법륜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붓다께서는 '양극단'을 피하라는 말로 역사적인 첫설법을 시작하셨는데,
양극단은 육체적인 쾌락과 육체적인 고행을 추구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붓다께서는 천하고 세속적이며 육체적인 즐거움에 빠지는 행위와
지나치게 육체에 고통을 주는 행위 모두가 깨달음을 얻는데 장애를 주는 행위들이기 때문에,
양극단을 모두 피한 중도(中道) 를 행하여야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붓다께서는 첫설법에서 '네가지의 고귀한 진리'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을 설하셨는데,
사성제는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 괴로움 소멸의 진리,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성제란, 인생이 괴로움으로 가득한 것이고,
그같은 괴로움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욕망을 없애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데,
그같이 괴로움을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의 고귀한 바른길(팔정성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자신의 깨달음이 바로 이 사성제에 대한 이해의 결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팔정성도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덟가지 방법 또는 요소들로,
올바른 이해(정견), 올바른 의도(정사유), 올바른 말(정어), 올바른 행위(정업),
올바른 삶(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알아차림(정념), 올바른 집중(정정)이 그것들입니다.
이 팔정도를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올바른 이해는 바르게 보는 것을말하는데,
네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앎을 의미 합니다.
2. 올바른 의도는 마음을 바르게 먹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세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욕망을 버리거나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2) 자신에게 적대감을 갖는 상대에게도 호의를 갖는 것.
3) 자신을 해롭게 하여도 상대방에게 악의를 갖지 않는 것.
3. 올바른 말은 바르게 말하는 것을 말하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 을 말하지 않는 등 그릇된 말을 삼가고,
다른 사람을 중상 비방 하거나, 위압적인 말을 하거나,
경멸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올바른 행위는 바르게 생활하는 것을 말하는데,
남을 해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올바르지 않은 이성교제를 하지 않는 것 을 의미합니다.
5. 올바른 삶은 바르게 일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섯가지 좋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지 않음으로서
고귀한 삶의 자세를 지켜 나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섯가지 좋지 않은 직업은 무기를 파는 직업, 생명이 있는 것을 파는 직업,
고기를 파는 직업(도살을 목적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것도 포함),
술과 같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 물건을 파는 직업, 독약을 파는 직업 등입니다.
6. 올바른 노력은 바르게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데,
다음의 네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계속해서 일어나는 삿된 생각들을 멈추게 하려는 노력.
2)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하는 삿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 하려는 노력.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좋은 생각들을 일어나게 하려는 노력.
4) 좋은 생각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도록 마음을 개발하려는 노력.
7. 올바른 알아차림 다른 말로 올바른 유의라고도 할 수 있으며,
바르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말하는데,
역시 다음의 네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자신의 몸에 대한 알아차림
2) 감각작용에 대한 알아차림
3) 마음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에 대한 알아차림
4) 바른 법에 대한 알아차림
8. 올바른 집중은 마음을 바르게 집중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가지 대상에서 또다른 대상으로 자꾸 흩어지려는 생각을
한가지 대상에 집중시키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위에서 설명한 팔정성도를 다시 3개 범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실라(戒) : 올바른 말, 올바른 행위, 올바른 삶
2. 사마디(定) : 올바른 노력, 올바른 알아차림, 올바른 집중
3. 빤냐(慧) : 올바른 이해, 올바른 의도
계.정.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세가지 요소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계.정.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게송 이 있습니다.
諸惡莫作(제악막작) 일체의 악업을 짓지 말고,
衆善奉行(중선봉행)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自淨其意(자정기의) 스스로의 마음을 맑게 하는 것,
是諸佛敎(시제불교)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르나트(녹야원) 박물관에 있는 초전법륜상
복제품이며 진품은 꼴까따의 인도박물관에 있다
⑧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여 명상하는 것이다.
** 내용이 다소 중복되고 불교를 설명하는 내용이 많아 비종교인들에게는 넓은 양해를 구합니다
네팔과 인도편에서는 비단 불교뿐아니라 인도의 많은 종교들
힌두교와 자이나교 시크교 이슬람교등 게시물에 해당하는 종교들을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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