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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21 16편 인도 아그라 타지마할(타즈마할)

관오덴짱 2014. 3. 14. 11:20

080421 15편 인도 아그라 타지마할

 

어제  카주라호에서 오르차를 거쳐 잔시에서 기차를 타고 아그라로 와서 숙박

오늘은 새벽부터 아그라 관광일정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방문하기 위해 아침부터 유난히 서둘러 호텔을 출발하여

타지마할 입장을 기다리는 시각은 현지시간으로 새벽 6시다

 

 

오전 6시에 타지마할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들의 줄

 

 

할일없는 소만 퀭한 눈을 멀뚱거리고 있다

 

 

타지마할 외부 성벽

 

 

 

 

 

타지마할 (타즈마할) Tāj Mahal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물이다.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타지마할의 정문 건물 

 

인도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Agra)의 남쪽,

 

야무나(자무나 Jamuna) 강가에 자리잡은 궁전 형식의 묘지로

무굴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이 왕비 뭄타즈 마할을 추모하여 건축한 것이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정문 건물을 통과하여 타지마할로 들어간다

 

 

정면 건물은 붉은 사암에 각종 보석같은 돌을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어 장식하였다

 

.

 

무굴 제국의 제 5대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재위 1592~1666)은 지혜롭고 총명한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끔직히 사랑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출산 도중 세상을 떠나자 샤 자한은 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드디어 정면 건물의 돔형 문을 지나 타지마할로 입장한다

 

 

'뭄타즈'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을 간직하고있던 그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화려한 무덤을 건설해

그녀에게 바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오~~!! 타지마할

장엄하다 아름답다

 

 

붉은 사암으로 된 아치형 정문을 통과하면

넓은 뜰에 수로가 있는 무굴양식의 짜르 박(Char Bagh)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을 수많은 정사각형으로 쪼갠후, 사이 사이 수로를 건설한 '짜르 박' 정원은 , 이슬람의 낙원사상을 담고 있다. 즉, 타지 마할은 뭄타즈의 무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다시 세상에 돌아와 누릴 낙원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길이가 약 300미터에 이르는 일직선의 수로 중앙에는 연꽃 모양의 수조가 있고,

분수가 물을 뿜어내고 있도록 되어 있으나 우리가 방문한 시점에는 수로에 물이 없어 아쉬웠다

 

 

수로에 비친 타지마할의 모습 또한 환상적이어서 수많은 사진가들이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뾰족한 건물을 보면 흔히 하는 놀이

 

 

'뭄타즈'가 죽은 이듬해인 1632년 시작된 공사는 그 후 22년이나 이어졌다

 

 

 

투여된 공사비만 요즘 돈으로 추정하여 720억원 , 1천마리의 코끼리, 2만명이 넘는 기능공등

연간 20만명이 동원되어

 

타지 마할은 그 전까지 인류가 만들었던 황후의 무덤 건설 기록을 대부분 갈아치웠다

 

 

 

설계는 이란 출신의 천재 건설가 우스타드 이샤가 맡았는데 그는 자신의 건축적 영감을 실현하기 위해

무굴 제국 각지와 이탈리아, 프랑스,터키,이란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장인을 불러들였다

 

 

 

최고급 대리석과 붉은 사암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되었지만,

궁전 내외부를 장식한 보석과 준보석들은 터키, 티베트, 미얀마, 이집트,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왕의 사랑과 쏟은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찬란한 무덤이라 불리는 타지마할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사랑의 금자탑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입구쪽  붉은 사암으로 된 정문건물 

 

 

사랑으로 빚어낸 찬란한 무덤

 

긴 수로의 끝에는 눈부신 순백의 대리석으로 지어진 본 건물이 서 있다.

 

 

네 모퉁이에 배치한 첨탑을 비롯해 좌우가 정확한 대칭을 이룬 건물은

육중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시공을 초월한 완벽한 아름다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22년 동안이나 그 무덤을 지었다는 한 남자의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

깃들었기 때문일까?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 타지마할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을 달리하며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고,

웅장한 건물은 중압감은커녕 오히려 공중에 떠있는 듯 신비롭고,

건물과 입구의 수로 및 정원의 완벽한 좌우대칭은 균형미와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우아한 돔이 인상적인 타지마할 본당 건물의 높이는 약 65M

거대한 중앙돔을 사이에 두고 4개의 작은 돔이 있다

 

 

 

 

타지 마할이 세워진 기단의 네 끝에는 각각 미나레트Minaret 라고 부르는 첨탑이 있어

대칭적 아름다움이 생명인 타지마할의 건축적 완성도를 높여준다

 

 

 

타지마할 본당에서 바라본 중앙수로

 

여기에 담긴 물은 타지마할을 오늘날의 신화로 만드는데 크게 일조를 하였다

 

 

 

 

연못을 통해 수면에 반영된 타지마할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심장을 멎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라고 한다

또한 한여름  아지랑이를 피워내 타지마할을 몽환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연출한다

 

 

타지마할의 본당 옆으로 위치한 아치형 건물

 

 

이 아치형 건물에 들어서면 아치형 문에 걸린 타지마할의 여러모습을 볼 수 있다

 

 

아치형 문에 걸린 타지 마할 모습 

 

 

 

 

2007년도 대한항공 여행사진 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권순태님의 작품 -  즐거운 점프

 

 

위 작품 사진을 그 전에 본 적이 있기에 여기에서 뛰어 보고 싶었으나

제대로 촬영해줄 짝이 없어 그냥 얌전한 포즈로... 팔을 벌려 촬영해 본다

 

 

내가 서 있는 걸 보더니 옆에 있던  여행객인 두 아가씨가 모델이 되어 주었다

 

 

 

 

 

 

 

 

 

 

타지 마할 본당의 뒷편은 바로 야무르 강에 붙어있다

 

 

야무르 강가

 

 

 

 

 

 

 

아침의 강렬한 태양을 받은 타지 마할

 

 

 

그나마 아쉬워 한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연못 물에 비친 타지 마할 본다의 모습을 촬영해본다

 

 

또 다른 반대편에 위치한 아치형 건물의 아치에서

 

 

 

드디어 타지 마할 본당 건물에 올라본다 

 

 

타지 마할 본당 건물에 올라서 내려다 보는 짜르 박 형식의 이슬람 정원과 중앙 수로

 

 

 

본당 입구

 

 

내부와 외부의 벽면은 보석과 준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리석에 무늬를 박아 넣는 피에트라 듀라(Pietra-dura) 모자이크 기법이

활용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물에서 볼수 있는 피에트라 듀라는

대리석에 곷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각각 다른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는 상감기법을 말한다

 

 

 

 

터키와 중국, 러시아에서 수입된 색색의 돌들이 순백의 대리석과 어우러져 오묘한 빛을 발한다

 

 

 

 

 

화려한 피에트라 두라와 함께 높이 평가되는 대리석 조각은

반투명한 대리석의 재질을 잘 살린 우아한 작품들로 평가된다

 

 

두 기법 모두 주로 표현한 것은 꽃 문양으로 이슬람교의 특성상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 등은 조각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당 건물 내부 1층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왕과 왕비의 관이 있지만

유골이 없는 빈 관이다. 샤자 한과 뭄타즈 마할의 육신은 지하 묘에 은폐되어 안장돼 있다

 

도굴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가묘 주위를 둘러싼  43가지의 준보석이 박혀있다는 화려한 석제 단 

 

 

타지마할 본당에서 입구쪽을 바라보며

 

 

본당에 오를때는 덧신을 신어야 하며 타지 마할에는 칼등 날카로운 물건 반입이 금지된다

 

 

샤 자한 왕은 애초 타지마할과 마주보는 야무나 강 건너편에 검은 대리석으로 자신의 묘를 짓고,

구름다리로 연결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무나 강 건너편에서 건물의 기단을 조성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다.

 

 

 

샤 자한 왕은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 10년 뒤인 1658년 막내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의 반란으로

왕위를 박탈당하고 아그라성  요새(Agra Fort)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 탑에 갇혀

죽을때까지의 말년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그라성 요새에서는 2km 떨어져 있는 타지마할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1666년 죽은 뒤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부인 옆에 묻혔으니

그나마 불행한 말년 속에서도 한가닥 오랜 바램은 이루어진 셈이다.

 

 

 

위대한 사랑의 금자탑인 타지 마할을 방문한 중년의 한국 부부들은 대부분 아래와 같은 사랑싸움을 한단다

 

중년부인: 아이고 이 사람은 부인을 위해 이렇게까지 멋진 걸 지어주는데 당신은 여태 뭘 해줬냐?

...............................

...............................

..............................

중년남편: 혹 먼저 죽으면 해주께

중년부인: 죽고 나면 무슨 소용있냐?

중년남편: 혹시 해줄지 아냐

 

 

 

 

타지 마할을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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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제국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7).

 

 

 

 

 

 

 

 

무굴제국을 세운 바부르(재위 1526~1530)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중앙 아시아와 북인도 지역을 확보하면서 동·서 무역의 핵심길목을 차지하게 된 바부르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함께 거머쥐었다. 1526, 북인도의 중심지 델리와 아그라를 차지하고서 스스로 '인도 황제(파드 샤)'라고 선언하였다.

 

무굴은 몽골의 인도식 표현으로, 바부르는 몽골의 티무르의 5대손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중앙 아시아에서 성장한 무굴 세력은 인도 중심부를 차지한 또 하나의 이슬람 왕조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1540년 한때 다른 세력에 밀려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어 제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악바르 황제(재위 1556~1605).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동쪽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는 화합의 정치를 내세워 인도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힌두-이슬람 문화가 발달하여 종교와 예술에서 융합되었고, 인도 사회 전반에 새로운 전통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악바르 자신은 이슬람 교도였지만, 힌두 교도와 비이슬람인을 억압하지 않고 힌두 교도의 인두세를 없애고 출신이나 종교에 관계 없이 제국을 위해 일할 기회를 주었다. 나아가 힌두교도가 많으며 독자세력을

구축하고있던 라지푸트 족의 공주와 결혼하여 몸소 화합의 정치를 선보였다.

 

악바르의 탁월함은 지배층의 폭을 넓힌 데에만 있지 않다. 그는 농민들에게 공평하고 효과적인 토지 개혁을 하기 위해 애썼다. 때로는 이웃 나라의 제도를 거울삼아 땅의 질을 분석하여 합리적인 토지 활용법을 찾고, 그에 따라 생산량을 따져 세금을 걷었다. 또한 어떻게 땅을 개간할 것인지 궁리하게 하고, 농사를 마음껏

지을 수 있도록 농민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제도도 마련하였다.

 

 

16세기 무굴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슬람 교가 전파된 길을 따라 아라비아의 전통과 페르시아의 문화, 튀르크 인의 풍습이 함께 실려 왔다. 이러한 모습은 중앙 아시아에서 활약하던 세력이 인도를 차지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차츰 문화 면에서도 기존의 힌두 교와 외부에서 온

이슬람 교가 융합되어 갔는데, 종교와 건축, 언어에서 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나크(1469~1539)라는 사람은 힌두 교와 이슬람 교가 가진 장점을 살려 두 종교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슬람 교처럼 유일신을 믿고 헌신적으로 살면, 힌두 교의 믿음대로 깨달음을 얻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계급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하여 눈길을 끌었고, 출가보다는 일상 생활에 충실하기를 권하였다.

 

우르두 어 또한 힌두-이슬람 문화의 대표적인 예였다. 우르두 어는 원래 튀르크 계통 이슬람 지배자들이

인도 용병을 부리기 위해 만든 언어인데, 민족과 종교 구성이 한층 다양해진 무굴 시대에는 일상 언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건축에서도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무늬에 인도의 연꽃 무늬나 만()자 무늬를 곁들인

양식이 발달하였다.

 

악바르 시대에 관대한 종교 정책이 시행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 교를 결합한 시크교가 탄생하였다.

악바르는 시크교에 관심이 많아, 펀자브 지방 암리차르 시에 대한 통치권을 시크 교도에게 넘겨 주었다.

이 곳의 황금 사원()은 시크 교도들이 평생에 한 번은 가 보고 싶어하는 성지가 되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지역등 지방의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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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편 아그라 성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