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유럽

100918 서유럽05편 - 프랑스 파리 01 루브르박물관

관오덴짱 2010. 10. 15. 15:25

 

 100918 서유럽 05편  프랑스 파리01

 

 

파리 힐튼 사를드골 에어포트호텔에서 본 사를드골 공항

 

파리에 있는 3개의 힐튼 호텔중 드골공항에 붙어있는 호텔이다.

덕분에 파리 시내까지 진입에는 택시비로 40-50 유로(1유로 1530원) 정도 지불해야 하는 거리다

 

 

 

 

호텔에서 시내까지 거리는 멀어도 파리 외곽순환고속도로를 타면 시내 접근이 용이하다

 

서울로 치면 호텔이 노원구에 있다면 개선문은 마포구청쯤 위치하고

에펠탑은 영등포쯤 위치한다

 

 

 

엘리베이트 타는 곳에서 내려다본 호텔 로비쪽 레스토랑

 

 

파리 외곽순환 고속도로로 오늘의 파리 관광 첫 번째 코스인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는 중

 

파리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유명한 프랑스의 수도이지만,

그만큼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진 곳이다. 

 

파리 인구가 215 만명(2005 년 기준)이라 하지만 교외 지역을 포함하면 1100 만 명에 이르는

메트로폴리스이다.  한 해 3 천만명 넘는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으며, 교육, 외교, 문화, 패션,

정치, 과학, 미디어 관련한 세계 중심 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침에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파리 시가지

 

 

파리는 1789 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진원지이며, 프랑스 산업 혁명의 중심지였다. 

프랑스인들, 특히 파리 시민은 파리야 말로 세계 최고의 문화 도시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또 많은 파리 광팬들이 있다. 

 

이런 사람에게 유럽을 관광하겠다고 하면, ‘빠리, 빠리, 빠리’ 라고 한다.

첫째도 파리, 둘째도 파리, 셋째도 파리라는 뜻이다. 

 

 

 

 

프랑스는 비옥한 토지를 가진 동시에

남과 북으로 바다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산과 들, 바다에서 다양하고 풍족한 식량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요리가 발달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그래서 유럽의 수도

자처한다.

 

 

이러한 프랑스 파리에 최근 유럽연합의 확대와 더불어 동구권의 집시족등

경제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타민족들이 몰려들어

범죄와 인종갈등등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점을 야기시켜

파리와 여러도시들이 점차 프랑스적인 색깔을 잃어 가고 있는 점이 큰 사회적인 문제점으로 대두되고있다.

이에 사르코지 대통령이 동구권 집시족등의 추방을 결정하였다가 이 또한 큰 사회적인 논란을 야기하였다

 

자유와 평등 박애등 프랑스 혁명 정신이 기본인 나라에서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 또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으로 프랑스와 파리는 요즘 각종 문제거리들로 몸살을 앓고있다고 한다   

 

 

 

 

루브르 호텔

 

 

파리다운 파격적인(?) 포스트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궁전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소장된 미술품의 규모는 세계 최대이다. 원래 루브르궁에는 역대 프랑스 국왕들, 특히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등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의 대미술관이 이루어졌다.

 


개관 이래 프랑스 미술의 중심적 구실을 하면서 전세계의 미술가나 미술 연구가 및 애호가들이 수없이 찾아들어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어 있다. 

 


수집된 미술품은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오리엔트 및 유럽 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등록이 완료된 것만 해도 총 20만 점을 넘는다. 

 

 

 또한 19세기 인상파 이후의 회화 부문 역시 루브르미술관 소관인데 그 작품들은 '인상파미술관'에 전시하다가, 1986년에 완공된 오르세미술관으로 옮겨 전시 중이며,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비롯하여 모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고흐 등 근대 회화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들의 우수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가장 대표적인 3대 소장품 은 


모나리자 (Mona Lisa),

사모트라케의 니케(Victoire de Samothrace),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루브르 미술관 피라미드 앞에서

 

 

 

카루젤개선문


파리에 있는 2개의 개선문 가운데 하나로 루브르 궁전 안뜰인 카루젤 광장의 중앙에 있다.

나폴레옹 1세가 거둔 많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808년에 건립한 파리에서 제일 오래된

개선문이다.

 

높이는 14.6m, 너비는 19.5m이다. 문 위에는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에서 가져 온 4마리의 황금빛

말이 장식되어 있었으나, 1815년 이후에 왕정복고를 상징하는 여신상을 중심으로 한 마차와

병사의 상으로 바뀌었다

 

 

 

 

카루젤 개선문에서 정확히 직선으로 보이는 에투알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의 입구가 위치한 피라미드

 

 

루브르 박물관 입장권

 

 

팜플렛

 

 

지하에서 본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다빈치코드에서는 저 피라미드 아래  마리아 막달레나의

 무덤이 있는 걸로 나왔다

 

 

 

 

[노인과 여인]                           

[아버지와 딸]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 벽에 있는  조각 

[Cimone e Pero]..키몬과 페로

 

고대 로마에는 페로라는 여인이 있었다  . 페로는  키몬이라는 노인의   외동딸이다.

그런데 키몬은 나이든 수감수인데 굶어서 죽도록하는 형을 받고있었다

  

페로는 매일 매일 죽어가고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안타까움에 발을  굴렀다,

페로는  고심 끝에  아버지를 면회가서(아무것도 들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함)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에게 제 젖을 물리기로 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대 로마의 문학이나 예술에서 “자식된 도리”를 설명하면서 예를 드는 이야기다.

자식의 아버지(부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사랑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심청전의 서양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Valerius Maximus)는 페로의 이러한 헌신은 부모를 공경하는 가장 고결하고도 숭고한 예라고도 하였다.


 

 

  후에  보카치오가 『로마식 자비』(Caritas Romana)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정리하고 펴내서 그 훈훈한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
루벤스 Pieter Paul Rubens는(  Sigen,1577년 6월28 -1640년 5월30 Anversa  ) 암스테르담에

그의 회화를 남겼고  이 주제는  많은 작가들의 그림,조각의  모델이 되었다.

 

 

 

루벤스의 노인과 여인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

 

 

오이디푸스가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 후 자기의 눈을 찌르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고성금지 포스트

 

 

루브르 박물관 조각전시관

 

 

 

 

잠든 양성구유

서기 2세기 원본에 따른 로마시대 복제품(매트리스는 르 베르낭이 첨가함)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으로 태어난 이 아름다운 쇠약한 청년은

그의 육감적인 나체에 남성과 여성이 결합되어있다

 

 

조각의 반대편에서 남성을 확인하는 순간 깜짝효과와 연극적의미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가들을  매혹시킬수 있었다

 

 

 

 

원본이 되는 조각과 이를 본 뜬 여러 비슷한 조각들을 한 장소에 비교전시하여

그 시대에 유행했던 유형을 한 눈에 비교하게끔 하였다 

 

 

 

웅크린 아프로디테

로마시대의 작품 서기 1-2세기

 

 

 

루브르의 3대 대표전시물중 하나인 <아프로디테> 통칭 '밀로의 비너스'

기원전 130-100년경

 

높이 204cm. 프랑스 루브르미술관 소장.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Melos) 라고도

한다. 1820년 4월 8일 에게해에 산재하는 키클라데스제도의 하나인 밀로스섬(밀로섬 또는 멜로스섬

이라고도 한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근방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마침 이 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이것을 입수하여 다음해 리비에르 후작의 손을 거쳐 루이 18세에게 헌납

되어 왕명으로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

 

 


그 후 연구 결과 현재는 BC 2세기에서 BC 1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품위 있는 머리부분이라든지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우아한 몸매의 표현에는 BC 4세기적인

조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두발(頭髮)의 조각과 하반신을 덮는 옷의 표현은 분명히 헬레니즘의

특색을 나타내고, 그 고전적인 자태는 헬레니즘의 극단적인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의 부활이라는 당시의 풍조에서 태어난 걸작이다.

 


허리부분을 단면으로 하여 상하(上下) 두 개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팔이 없다.

그 없는 부분의 복원(復元)에 대해서는 그 제작연대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자나 미술사가 사이에서

계속 많은 고찰이 있었다.

 

결국 오른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지고 왼손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제쳐진 손바닥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21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후 두문불출의 명작으로도

유명했으며, 1964년 처음으로 세계나들이를 한 바 있다.

 

 

 

 

루브르 궁전(박물관)의 천정화

 

 

 

아그리파

 

로마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로 아우구스투스의 정계 진출을 도왔으며, 그의 군사적·외교적

성공에 크게 공헌했다. 수도·욕장·판테온 등을 신설하고 로마 제국을 측량하고 지리서를

저작하여 세계지도 작성의 기초를 닦았다.

 

 

 

 

 

 

 


 


 

아그리파와 미남 대결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와 친교를 맺어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 아우구스투스의 정계 진출을

도왔으며, 그의 군사적·외교적 성공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BC 36년 섹스투스·폼페이우스에 대한

 해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항한 악티움해전의 공은 절대적이었다. BC 21년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였고, 로마시(市)의 미화를 위해 수도·욕장·판테온(원형신전)

등을 신설하였다. 또한, 로마 제국을 널리 측량하고 지리서(地理書)를 저작하여 로마제국에 있어서

세계지도 작성의 기초를 닦았다.

 

 

감상

 

 

 

 

 

 

 

사모트라케의 니케(Victoire de Samothrace),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BC 190년경에 제작된 작품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뱃머리에 살포시 발을 딧는

날개가 달린 니케(승리의 여신)를 표현하고 있다.

 

 

1863년 사모트라키섬에서

머리부분과 양 팔뚝은 없이 여러 조각의 돌무더기로 발견되어 프랑스에서 복원하었다.

 

 로도스섬 사람들이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에 대한 전승을 감사하여

사모트라키섬 카베이로 신역(神域) 가까이에 세운 상(像)으로 추정된다.

  

 

 

 

 

 

루브르 박물관 회화전시관

 

 

 

 

사빈느의 여인들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DAVID, Jacques-Louis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1799
Oil on canvas, 385 x 522 cm
Musée du Louvre, Paris

 

 

'사빈느' 여인의 겁탈

 

 

'로물러스' 형제에 의해 로마가 세워진 후 그곳 로마에는 여인들이 부족했다.

그러자 '로물러스'는 대전차 경기장 인근에서 '사빈느' 부족들에게

딸과 아내를 동반토록 하여 큰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열리는 동안 로마인들은 '사빈느' 여인을 습격하여

강간을 하고 남자들은 내 쫓아버렸다.

  

몇년이 흐른뒤 '사빈느'의 남자들은 자신의 부족 여인들을 되찾으러

로마를 공격을 하게된다.

그러나 그때 '사빈느'의 많은 여인들은 원했든 원치 않았든간에

로마인들의 자식을 낳아 이미 그들과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쪽도 다치기를 원치 않았던 '사빈느'의 여인들은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데리고

대치하고 있던 양쪽 군인들 사이로 뛰어 들어가 화해를 청했고

결국 '로물러스'와 '사빈는'부족은 화해를 하고 동맹을 맺게 됐다.

 

가운데 하얀옷을 입은 여인이 팔을 벌려 양쪽을 말리려 하고있다.

그 여인은 '사빈느' 출신의 '로물러스' 황제의 부인' 헤르실라'(Hersilia)다.
'헤르실라'의 양쪽에는 칼을 들고있는 그녀의 아버지와
창을 들고있는 '로물러스'가 대치하고 있다.

 

이때 다비드는 신 고전주의 화가답게
군인들의 벗고있는 모습에서 육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있다

 

 

'다비드'는 당시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이 그림을 통하여
양 진영의 냉정을 바랐던것 같다. 
 

 

 

 

 

 

나폴레옹 1세 황제의 대관식 1806-1807작품   자크 루이 다비드

 

1804년 왕실 미술가로 선임된 다비드는 나폴레옹 제정기의 공식 미술가로서 다시 한번

선전미술을 담당하게 된다

 

다비드는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로 황제가 된 나롶레옹이 그해 12월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한 대관식을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노라마로 재현하였다

 

황후가 앉아있는 아치 두번째 줄에 이 장면을 스케치하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등장하는 인물만도 수십이 넘는 이작품의 호사스러움과 생생한 인물들의 표정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전통적으로 황제는 교황에게서 관을 받았는데,이는 왕실의 권위가 신에게서 나오며(왕권신수설)

교회는 국가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능력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에 걸맞게 스스로 관을 쓰고

황후에게 수여하여 이 모든 예식을 주관하고있다

(나폴레옹 뒤에 앉아있는 뻘줌한(?) 모습의 교황이 보인다)

 

 

교황에게서 관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지 않았던 것은 권력의 독점이라는 측면보다는

자신이 제정을 다시 펴지만 교회라는 구습을 거부하는 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베르나르 산을 넘는 나폴레옹 - 다비드  베르사이유박물관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은 총통시절의 모습으로 날뛰는 말위에서 한치읭 흔들림도 없는 모습이다

다비드는 왼편 아래 바위에 샤를마뉴,한니발이라고 적어 나폴레옹ㅇ르 유럽을 통합했던 역사 속 인물들과

동일시 하였다

 

 

 

 

 

 

나폴레옹 1세 황제의 대관식 1806-1807작품   자크 루이 다비드

 

이그림은 네작품을 주문하였는데

단지 두작품만이 제작되었다. 한편의 같은 그림은 베르사이유궁전에 보관되어 있다

 

 

  

 

재밌는 사실은 ...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된 그림을 제작한 다비드는 주문대로 곧 이어

똑 같은 작품을 한 부 더 제작하였는데

 

루브르 박물관의 그림에서는 왼쪽 하단의 여인들이

같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반면

 

 

 

 

베르사이유궁전에 보관된 2번째 제작된 같은 작품속에서는 왼쪽 아래

4번째에 서 있는 여인의 드레스가 분홍색으로 바뀌어져 그려져있다

 

다비드가 무척 좋아했던 여인이라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찍은

 나폴레옹 1세 황제의 대관식 - 다비드 작

 

 

 

 다비드의 자화상

 

다비드(1748-1825)의 생애는 프랑스가 역사적으로 특히 혼란스러웠던 시기와 일치한다

루이 15세 통치때 태어나 프랑스 대혁명을 겪고 나폴레옹 황제후 샤를르 10세 군림으로 망명지에서

죽었기때문이다

다비드는 그를 전형적인 참여 화가로 간주할 만큼 파란만장한 많은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 - 쟈크 루이 다비드(1748-1825)

1800년

 

 

 

교황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작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이념은 앵그르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나폴레옹의 누이동생인 카롤린 뮈라를 그린 이 그림은 파리에서 1819년 미술전에 전시되었다

 

그 당시 비평가들은 화가가 옆으로 누워있는 여인의 척추 뼈마디를 세개 더 그렸기 때문에

이 여인의 등을 따라 그려진 기다란 곡선이 해부학적으로 잘못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비평하기도 했다

 

현실의 세심한 관찰자인 앵그르는 때때로 형태가 주는 풍부한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델들의 몇몇 성격들을 강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관능을 암시하는데 사용된 장식적인 액세서리들은 반대로 이 나체의 완벽함을 돋보이게 한다

 

 

 

 

 

 

 

 

 

 

여자의 가슴에 손을 얹거나 만지는 자세로 그려지는 남자는

여자의 남편이거나 약혼자라고 한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전시된 그림의 유의점을 설명하시는

화가이신 프랑스 현지 가이드님  

 

종이의 아래쪽에는 위의 오달리스크 그림에서 왜 척추뼈가 3마디나 더 길게 그려졌는지 설명한 그림

 

 

 

 

 

카나에서의 결혼식 - 파울로 칼리아리, 통칭 베로네즈

 

 

방탄유리 속에 위치한 모나리자

 

<리사 게라르디니의 초상화> 통칭 <모나리자> 또는 <라 조콩드> 1503-1506년경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모나리자 [Mona Lisa] 

 

유채(油彩) 패널화로 크기는 세로 77㎝, 가로 53㎝이다.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라 조콩드(La Gioconda)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를 통하여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본명은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이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城)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洗淨)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작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 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메두사호의 뗏목 The Raft of Medusa]  제리코(1791-1824)

 

 

사회적 화제가 된 당대의 사건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낭만주의 선언이 되었던 작품이기도 한다.

1816년 여름, 난파된 메두사호의 생존자 15명이 기적적으로 구조되고, 이를 둘러싼 갖가지 풍문이

떠돌자 제리코는 이 사건을 한 작품으로 구상한다.

 


군인들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에 정착할 이주민 등 400여 명을 태운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한 것은 1816년 7월 2일이었다. 선장과 고급 선원 등 250명은 구명 보트를

타고 떠났고, 나머지 하급 선원과 승객 등 150명은 급조된 뗏목을 타고 표류하게 된다.

 

그러나 12일에 걸친 표류 끝에 작은 범선 아르귀스호에 의해 구조된 것은 15명뿐이었다.

생존자들이 굶주림을 못이겨 죽은 사람의 인육을 뜯어먹었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과 시련은 많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 비리와 정부의 무능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다

 

 

 


사건을 재생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느 장면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제리코는 오랜 표류 끝에 멀리 수평선 위로 나타난 아르귀스호의 모습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생존자들을 찾아 다니며  증언을 듣고 뗏목의 모형까지 만들었다.

다시 시체 안치소를 찾아가 시체의 상태를 연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화면 구성을 위한 많은 데생·

스케치를 거쳐 1819년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 거대한 그림은 동적인 구도, 뛰어난 명암법 사용과 색채 효과 등으로 극적인 장면을 표현함으로써 그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819년 아카데미아에 처음 출품하였을 때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실망한 제리코는 1820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는 이 그림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낭만주의의 선언이 되었다. 


 

  

 

 

 

 

 

 키오스 섬의 대학살 -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

 

 

 

이 그림은 1822년 일어난 그리스독립전쟁 때 터키인들이 키오스섬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민가가 모두 불타고 섬 주민들이 약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표현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이 잔인한 사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담아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림 앞쪽에는 지쳐서 누워버린 키오스섬 사람들을 체념과 고통, 고뇌가 뒤섞인 표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여자를 납치해 가려는 터키 기마병들의 잔인한 장면을 화면 왼쪽에 담아 처참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감을 부여하였다. 이들 뒤로 불타오르는 민가와 전투로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검붉은 바다와 짙은 저녁 노을이 암시하는 우울함과 적막함이 그림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켜 준다. 작가는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더욱 생동감 있게 표현해 내었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 "회화의 학살"과 같은 그림이라는 혹평을 받았으나, 뒤섞인 곡선과 강렬한

색채, 자유분방한 필치로 대표되는 들라크루아의 화풍이 이 그림을 통해 결정되었고, 동시에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의 전형이 여기서 탄생하게 되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1798∼1863)의 작품.

 

 

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며,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1830년에 제작되었고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에서 시민군을 이끄는 이는 알레고리로 표현된 자유의 여신으로서 공상적인 현실,

즉 낭만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비현실의 진리를 대변한다.


들라크루아는 1830년 10월 18일 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현대적인 주제, 즉 바리케이트전(戰)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직접 나서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 이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7월혁명에 대한 들라크루아의 관심은 정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들라크루아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감성과 개성,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이용하여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이다. 회화 기법에 대담한 혁신을 가져온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1831년 살롱에 출품되어 상당한 호평을 받았으며 7월왕정의 수반인 필리프가 작품을 사들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 때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 진열되기도 하였다.

들라크루아가 죽은 뒤인 1874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나오며

 

 

 

 

  

 

 

  06편 콩코드광장 개선문 베르사이유궁전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