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유럽

100918 서유럽06편 - 프랑스 파리 02 콩코르드광장, 개선문,베르사유궁전

관오덴짱 2010. 10. 20. 21:27

 

100918 서유럽 - 프랑스 파리 06 콩코르드광장, 개선문 

  

 

 

파리와 로마는 이렇게 돌을 깔아놓은 오래된 도로들이 많다.

어떤구간은 보수를 위해 그 위에 아스팔트를 다시 깔기도 했지만..

 

잠깐동안 파리나 로마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이렇게도 말을 한다

'조상들 잘 만나서 조상들 뼈 팔아서 후손들이 먹고산다'라고

 

하지만

오래된 건물과 유적들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불편함을 참고 견디는 파리와 로마등의

고도시의 시민들의 희생은 그 도시에 살아보아야만 알수 있다고 한다 

 

 

오전 루브르 박물관을 보고 나와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향했다

 

 

 

 

 

 

 

 

잔다르크 동상

 

 

 

 

저 멀리 보이는 방돔 광장

 

루이 14세를 기념해 조성한 광장

광장 중앙의 높이 44M의 둥근 탑은 나폴레옹이 오스테를리트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서 세웠다 

 

 

콩코르드 광장

 

 

 

콩코르드광장 [Place de la Concorde]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서쪽으로는 샹젤리제거리와 통하고

남쪽에는 센강에 걸린 콩코르드교(橋)가 있다.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광장의 중앙에는 이집트로 룩소르신전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분수와 조상(彫像)이 있다.

 

 

18세기에 루이 15세의 명으로 만들어졌으며, A.J.가브리엘이 설계하였다.

중앙에 루이 15세상(像)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부르다가 프랑스혁명 때 루이 15세상이

파괴되고 ‘혁명광장’으로 개칭되었다.

 

프랑스 대혁명때는 이곳에 단두대가 설치되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1,343여 명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뒤에 다시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로 개칭되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보이는 에펠탑

 

 

 

 

이집트 룩소르

룩소르신전  2009년 5월 방문때 사진이다

 

 

정문앞에 쌍으로 서 있어야 할 오른쪽 오벨리스크가 기단부만 남아있다

 

 

오른쪽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파리로 옮겨져 콩코르드 광장에 서있다

 

프랑스가 오벨리스크를 가져가며  대신 답례로 이집트에 준 시계가

 이집트 카이로 '가마 무하마드 알리'라는 모스크(이슬람사원)에

장식되어 있는데 이 시계는 곧장 멈춰섰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

 

 

 

 

 

파리 콩코드 광장으로 옮겨진 룩소르신전의 쌍둥이 오벨리스크 중 하나

 

 

프티 팔레

 

그랑팔레 건너편에 있는 건물로 그랑팔레 알렉상드르 3세다리와 함께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해

만든 건조물이다. 현재 파리 시립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요일을 맞아 일부 개방하는 관공서를 보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한다

 

 

상제리제 거리를 통과하여 개선문으로

 

 

 

 

 

개선문을 잠시 남겨두고선

 

 

 

 

 

점심 먹으러 현지 식당으로 향한다

 

 

 프랑스-이탈리아식 전문 레스토랑

프랑스 사람들이 '달팽이 요리'를 먹게된 유래가 이렇다고 한다..


와인의 나라 불란서는 와인생산을 위한 포도밭이 전국 곳곳에 퍼져있다.

식용달팽이인 에스까르고는 포도나무 잎을 좋아하기 때문에 포도밭이 있는 곳이면 쉽게 사육할 수

있으며 달팽이의 품질 또한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의 달팽이가 풍부한 맛으로 유명하다.


특히 와인으로 유명한 '부르고뉴(Bourgogne)'와 '샹파뉴(Champanue: 샴페인의 프랑스식 발음)'

지방의 에스까르고는 특별한 품질로 프랑스에서는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달팽이를 양식하여 먹거리로 활용한 역사는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식에 대한

남다른 집착으로 보였던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달팽이 요리를 즐겼으며 이 시기에 이미 양식된

달팽이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15세기 경 프랑스의 한 법관이 빈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자신의 영지를 포도밭으로 만들어 포도를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포도 재배가 늘어나자 그 잎을 갉아먹는 달팽이가 자연스럽게 증가하였고

해충구제 차원에서 잡은 달팽이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식용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달팽이 요리가 대중화 된 것은 18세기 이후라고 한다.

 

 

에스까르고(Escargot)


 기다리던 '달펭이 요리 (Escargo)'를 에피타이저로 점심식사를 하다


에스까르고에 나오는 달팽이는 우리네 달팽이와는 종류가 다르다.

우선 크기에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달팽이 보다 크기가  크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되는 부르고뉴 달팽이의 경우 대락 4cm 정도로 우리나라 달팽이의

몇 배 이상의 크기.


모든 먹거리에는 때가 있듯이 달팽이도 겨울 직전의 달팽이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하는데,

동면 직전의 달팽이가 가장 기름지고 맛이 좋다는게 정설이다.

 



프랑스에서 에스까르고 요리는 20가지가 넘는다.

가장 유명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스까르고의 조리법은

'부르고뉴식 구이(escargots la bouruignonne)'이다.


푸르스름한 소스는 소금, 후추, 다진 마늘, 에샬로트, 파슬리 등을 향신버터와 섞어서 만든 것.

달팽이 속을 빼먹은 후엔 접시에 푸릇한 소스가 약간 남게 되는데 바게트빵을 찍어 먹는다.

에스까르고는 2가지의 맛이 있다. 달팽이 특유의 오톨도톨 씹히는 감촉과 향미를 즐기는 첫 맛과,

달팽이를 다 먹은 후 그릇과 껍질에 남아 있는 향신버터를 바게뜨에 찍어 먹으니  특별한 맛이

있다.

 

 


물론 에스까르고는 에피타이저, 뒤이어 삶은 감자 서너 조각에 스테이크가 올라왔고,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이 뒤를 이었다.  

 

 

 

점심을 먹은 레스토랑

 

 

구이를 하기전 달팽이에 소스를 재워놓은 모습

 

 

 

 

 에투알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 1세가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하였다.

설계는 주로 J.F.샤를 글랭이 맡았으나 그는 얼마 안 가서 죽고 나폴레옹 자신도 실각하였기 때문에

공사는 중단되었다가 183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높이 49 m, 너비 45 m로 대체로

고대 로마의 개선문의 양식을 따랐으나 프랑스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각부(脚部)를 장식한 조각 가운데 F.뤼드의 《라 마르세예즈(進軍)》(1833~1836)은 특히 유명하다.

 

 

 

 

 

에투알 개선문 무명용사 기념비

 

아치의 중앙 밑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무명용사 묘비가 세워져 있다  

 

  

 

 

 

라데팡스(La Defense), 신 개선문


라데팡스는 파리 시내 서쪽의 현대적인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으로,

오피스 빌딩들 뿐만 아니라 호텔, 아파트, 상가, 레스토랑, 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라데팡스 지역에 있는 신 개선문은 덴마크 건축가 Johann Otto von Spreckelsen의 설계에 의해

1989년 완공되었는데, 실제의 개선문과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폭 또한 똑같다.



신 개선문은 파리 중심의 루브르에서 시작되어 샹제리제 거리, 개선문을 따라서 보불전쟁(1870~1871) 때 파리 방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작은 기념비에 이르는 연장선상의 끝에 위치해 있다.


작은 기념비들은 그 주위의 고층빌딩들에 가려 장난감처럼 작게 보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La Defense라고 불르게 되었다.



 

 

건설을 명한 나폴레옹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장례 행렬이 이 문을 지나갔고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유체도 이 문 밑에서 하루밤을 지샛다

 

계단을 통해 개선문을 올라가면 주변의 풍경을 시원하게 볼 수 있다고 하나

단체여행의 한계로는 불가능하다

 

 

 

개선문에 올라가서 바라본 신개선문쪽 사진(인터넷 펀 사진) 

 

 

 

샹젤리제거리(Avenue des Champs Elysees )

샤를 드 골 광장에서 방사선으로 뻗은 12개의 거리 중 하나이며 가장 넓은 길이다.

콩코르드 광장까지 길이 약 2km이며 폭은 124m에 이른다.


 

 

 

 

각부(脚部)를 장식한 조각 가운데 F.뤼드의 《라 마르세예즈(進軍)》(1833~1836)은 특히 유명하다.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과 에투알 개선문

 

 

개선문 인근에는 이러한 특이한 복장으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전에 루브르박물관, 콩코르드광장을 보고선 점심을 먹고

개선문을 들렀다가..

베르사이유궁전을 향했다

 

세느강을 따라 베르사이유로 이동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위험한 장난을 치는 젊은이들

 

 

몸을 거의 차창 밖으로 내어놓고 일행들끼리 위험하게 장난을 치고있다

 

 

 

 

베르사이유궁전 전경

 

 

 

 

베르사유 궁전 Palace of Versailles

베르사유 궁전(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왕실성당인 성 루이 성당

 

 

베르사유궁전은 유럽3대 궁전의 하나로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바로코건축의

대표작이다.

 

 

1634년에 루이 13세에 의해 사냥궁으로 세워진 베르사이유 궁전은루이 14세에 의해 확장공사가

있었으며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은 편으로  

1682년에서부터 프랑스 대혁명1789년까지 루이14세~16세까지 107년간 왕의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총700개의방으로 거울의방.전쟁의방.평화의방.루이14세의방등이 있다 

 

 

 

 

1870년에는 프러시아 군사령부가 주둔했으며

1871년에는 프러시아의 왕이 빌헬룸1세라는 이름아래 대관식을 갖기도 하였음.

 

이런 굴욕의 역사를 설욕하기 위해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조약을 이곳에서 갖기도

하였다.

 

 

 

왕실 성당(성 루이 성당) : 루이 15세, 16세, 18세와 샤를 10세의 결혼식이 있었던 곳으로 매일

13시에 미사가 있었다.

1710년에 완성된 이 성당은 천정에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을 알리는 벽화가 유명하다.

 

 

 

베르사유궁전의 방에 걸린 그림들

 

 

 

궁전안에서 내려다본 베이사유궁의 정원

 

 

베르사유궁의 전경을 담은 그림

 

 

 

왕족과 귀족부인들의 초상화

 

 

 

 

 

 

 

 

 

                                             비운의 왕비 마리앙트와네뜨의 초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아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려고 하였으며(외교 혁명), 그 일환으로 프랑스의 왕태자 루이16세 와의 정략 결혼을 획책하였다.


1770년  마리는 14살의 나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와의 결혼식을 치러 프랑스의 왕태자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부부 사이는 취미나 기질 등의 불일치, 루이의 성(性)불구(나중에 치료를 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 등의 문제로 서먹하여 결혼한 후 7년 동안이나 독수공방하며 자녀가 없었다.


그녀는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치에 몰두했다는 설이 있으며, 밤마다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트리아농에서 호화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면서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그녀의 몸을 치장하는 의상, 장신구, 보석 등에 소요되는 비용은 엄청났으며 이는 국민의 세금부담으로 이어졌다.


당시 절대 왕정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그녀는 호사스럽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여 세간에 좋지 못한 평판을 남겨 프랑스 왕실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으며 민심까지

잃었다. 또 그녀는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녔고 향락적인 생활을 했으며 독서를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실례로 그녀는 민중들에게 ‘적자부인’이라는 비난어린 별명으로 불렸다. 그래서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종종 서신을 보내 그녀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1783년 정원에 세워진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원적인 연못


1774년, 루이 15세가  서거하고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트리아농 궁전을 전원적인 분위기로 개조하는 데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다. 거기에다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여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시켰다.


이러한 와중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스웨덴 귀족과의 염문이 궁정 내에 확산되었다. 

한편, 그녀는 폴리냑 백작부인 등 자신의 마음에 드는 소수의 귀족들만은 극단적으로 총애했다.

그녀의 그룹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그녀와 그 총신들을 향해 매일같이 악담을 퍼부었다.

베르사유 외의 다른 장소, 특히 파리에서는 이러한 정세가 심했다고 한다.

대부분 유언비어에 불과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세가 파리 민중들의 증오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녀와 관련된 소동은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 혁명때 배고프고 성난 민중들이 빵을 달라고 외치니 당시 왕비인 마리 앙투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고기(어디에서는 케익)를 먹지, 왜 그래요?”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1789년 7월 14일, 왕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하여,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폴리냑 백작부인 등 그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비호를 받던 귀족들은 그녀를 버리고 망명해

버린다. 국왕 일가는 혁명군에 의해 포로 신세로 전락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의  궁전으로 신병이 옮겨져 갇혀 지내면서 혁명군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1년 6월 20일 탈출 계획을 실행에 옮겨  몰래 파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마차와 행렬이 지나치게 화려한데다가 진행속도가 느린 탈출시도는 곧 다시 잡혀 신원이 발각되었다. 결국 국왕 가족은 6월 25일 파리로 끌려오게 됨으로써 탈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국왕 일가는 친 국왕파 세력으로부터도 호감을 잃고 만다.


1792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군에게 프랑스군의 작전을 몰래 알려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8월 10일,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국왕 일가를 탕플 탑에 모두 투옥시켰다(8월 10일 사건). 10접시 이상의 저녁식사가 제공되고 30명의 재봉사를 고용하는 등 대우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1793년 1월 21일, 혁명 재판은 루이 16세에게 사형 판결을 내려 단두대로 참수형에 처했다. 

그해 8월 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콩세르쥬리 감옥으로 이감된 뒤, 10월 초에 공개 재판을 받았지만, 결과는 처음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1793년 10월 15일, 그녀는 혁명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다음날인 10월 16일, 콩코르드 광장에서 남편의 뒤를 따라 단두대에 의해 참수당하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루이 17세)참수형 당일,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에 내뱉은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였다는 설이 있다.

 

 



 


 

기본적으로 단두대로 처형할 시에는 사형수의 얼굴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우는 얼굴을 일부러 위로 향하게 해서 위에서 칼날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진위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이러한 이야기는 그 당시 그녀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증오심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일 화려한 거울의 방.

 

  

 

거울의 방 : 이태리식 테라스가 있던 곳에 8년에 걸쳐 망사르의 설계와 르브랑의 장식에의해

길이 73미터, 너비 10.5미터, 높이 12.3 미터의 거대한 갤러리 헝식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17개의 창문과 17개의 대형거울이 천정에 걸려있는 샹들리에와 함께 빛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하여주며 왕정시 있었던 가면 우도회와 중요회의 모습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다비드가 그린 나플레옹1세황제의 대관식 - 베르사유궁전 소장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같은 그림과 달리 왼쪽 아래  네번째 여자의 옷이 분홍색 드레스로

바뀌어 그려져있다.

 

 

윗 이야기내용을 처음 보시고 그 이유를 모르시는 분은 루브르 박물관편의 다비드의

나폴레옹1세황제의 대관식 그림 설명을 다시 한 번 보아주시기 바란다.ㅋ

 

 

 

 

베르사유궁전의 남쪽 날개의 대회랑

 

                                                   웅장함에 압도당한다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은 따로 입장권을 판다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베르사유궁전의 정원

 

궁전을 끼고 있는 정원은 걸어서 둘러볼 수 있으나 마리 앙트와네트가 파티를 열거나 할때

즐겨찾았던 프티 트리아농등은 마차나 다른 이동수단을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거리일 정도로

정원은 넓다 

 

 

 

윗 그림의 앞에 사각형정도가 우리가 몇 시간동안 걸어다니면서 본 베르사유궁전과 정원이고 

위 그림의 전체가 베르사유궁전의 정원이다

 

궁전뒤인 서쪽으로 끝없이 쭉 뻗은 정원이 보인다

 

오른쪽 귀퉁이인 북서 지역이 마리 앙트와네트 루이16세 왕비가 파티를 열때 즐겨찾았던

프티 트리아농과 정원이 있는 지역이며 그 인근에 마리앙트와네트 영지가 있다

 

 

베르사유궁전의 정원으로 나와서 궁전을 배경으로

 

 

남쪽 정원

 

 

 

베르사유궁의 전경

 

 

 

 

서쪽 정원으로 내려가는 길

 

마차나 다른 이동수단을 통하지 않고 걸어가는 경우는 끝없는 길을 가야한다

 

 

베르사유궁의 전경.

아래 석장을 이어서 보시면 된다.

 

 

 

 

 

 

 

 

 

 

위 두장의 사진을 이어보았다

 

 

 

베르사유궁의 서쪽에 위치한 라또나 화단과 분수

 

 

 

계단을 내려가 분수 앞에서 가족 단체 사진을 찍기로 하고

카메라를 부탁하고선 눈으로 봐둔 자리에 분수를 뒤로 하고 선 순간

엄청나게 멋쩍은 상황이 벌어졌다.ㅎㅎ

 

 

분수앞의 계단에 앉아 분수와 서쪽 정원을 내려다 보고 있던 저 수백명의 사람이 일순간

전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ㅋ

 

 

 

 

      정말 멋쩍은 상황이라  얼런 사진 몇장 찍히고는 자리를 비켜섰다

 

라또나 화단과 분수


 

북쪽 정원

 

 

 

 

 

안사람이 궁전의 남쪽 날개의 대회랑을 못보고 내려왔다고 하길래

정원에서 궁전으로 다시 입장할 수 없음에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 사정 사정하여 꺼꾸로 궁전건물로 들어가

남쪽 대회랑을 보고 내려왔다

 

 

 

 

 

베르사유 궁전을 나오며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오는 길의 세느강

 

 

미라보다리와 세느강과 에펠탑

 

 

미라보다리아래로 세느강은 흐르고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

                                                       

                                                            -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허나 괴로움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나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손과 손을 붙들고 마주 대하자.

               우리들의 팔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이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흐르는 물결같이 사랑은 지나간다.

               사랑은 지나간다.

               삶이 느리듯이

               희망이 강렬하듯이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흘러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고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만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있다.

 

 

세느강변의 에펠탑

 

 

 

다시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고

 

 

 

 

파리 쁘렝땅백화점에서 쇼핑시간

 

 

 

 

추석기간 몰려드는 한국 중국 일본관광객을 위해 아예 황금연휴라는 한글판 카탈로그가

준비되어 있다

 

 

 

쇼핑시간동안 둘째와 셋째를 데리고 파리 시내 거리로

 

 

 

쁘렝땅 백화점

 

 

 

이번엔 쵸콜릿 가게를 들어가서

주는 쵸콜릿으로 시식도 해보고

 

 

몇 개 골라서 한봉지사고선

 

 

 

파리에선 모든 그림자가 에펠탑을 닮나보다

 

 

 

 

파리 지하철역

 

 

쁘렝땅백화점 내부

 

 

 

 

파리 오페라 하우스

 

약 700m에 달하는 파리의 번화가 오레라 거리(쁘렝땅백화점도 이 거리에 위치한다)의 정면에

세워진 오페라극장은

1862년 착공하여 1875년에 완공된 샤를 가르니에 작품이다

좌석수는 2200여개이며 무대 등장인물은 한번에 450명까지 가능해 규모면에서는 세계 최대다

 

 

 

서유럽 7편 파리 3편 세느강 유람선과 파리 야경촬영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