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715 서불산 05편 영주의 심성 부석사 02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었다.
무량수전,안양문,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 자답 했다.
(국립박물관장이셨던 고(故)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선생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중에서....)
무량수전 뒷 켠의 선묘각
옛날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병이 들어 양주성 어느 신도집에서
요양하게 되었는데 그 집의 과년한 딸 선묘(善妙)라는 낭자가 그만 의상에게 반
하여 연정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온갖 교태를 부려 의상을 유혹하려 했으나
구도의 일념에 가득찬 의상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이에 더욱 감명을 받
은 선묘낭자는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의하고 제자가 되어 스님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바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의상은 몸이 완쾌된 후 종남산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학의 정수를 체득하고
스승으로부터 법통을 인가받아 10년만에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양주성 선묘낭자집에 들러 그 동안의 후원을 감사드리는 인사를 하려했으나
마침 선묘낭자가 출타중이어서 만나보지 못하고 떠나오게 되었다.
뒤늦게 의상대사가 귀국길에 오른다는 것을 안 선묘낭자가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법의와 집기를 대바구니와 함께 가득 담아 가지고 해안으로 달려나왔다.
그러나 의상대사를 실은 배는 이미 떠나가는 중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선묘낭자가 합장을 하고 "저의 참된 본심은 스님을 공양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이 옷함이 저 배에까지 이르기를 바라옵니다"하고 기도를 하며 함을 바다 위에 띄우니
갑자기 바람이 일어 새털처럼 날아 의상이 탄 배에 닿았다.
그녀는 또다시 제 몸이 용으로 변하여 수천리 뱃길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하여
바다에 뛰어드니 바다의 신도 그녀의 원력에 감동하여 용이 되게 하였다는 것이
다.
그후 선묘낭자는 용이 되어 서해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고 의상의 귀국길을 보
살폈고 의상이 이곳 봉황산 자락에 화엄종지를 펼치기 위해 전법도량을 만들
때도 이적을 보여 의상을 도왔다.
의상이 왕의 명에 따라 이곳에 화엄종의 사찰을 세우려하자 종파를 달리하던
무리들이 모여 방해하였는데 선묘낭자가 허공 중에 큰 바위돌로 변신하여 그들
의 머리위를 맴돌자 혼비백산 흩어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뜬 바위가 된 선묘낭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부석사(浮石寺)라 이름하
였고 무량수전 뒷편에는 선묘각이 있으며 그 당시 이적을 부렸던 부석바위가
실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선묘낭자는 부석사를 영원토록 수호하기 위하여 석룡으로 변해 무량수전
밑에서부터 절마당 석등자리에까지 몸을 묻었고 지금도 그 석룡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시대.
보물 제249호. 높이 5.26m, 기단(基壇) 너비 3.56m이다.
무량수전 옆 삼층석탑쪽으로 오르면 조사당과 응진전 자인당과 자인당내 삼존석불이 있는
곳으로 오르게 된다
무량수전 옆 삼층석탑 자리에서 바라보는 부석사 전경
오른쪽 누각이 안양루다
왼쪽의 안양루와 오른쪽의 무량수전
무량수전 옆 삼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에서..
비구름에 가려 아쉽긴 하지만 ..부석사 최고의 전망지이다
(윗 사진은 2009년 9월 방문시 사진입니다)
산을 내려가며 산을 거스러지 않고 경사에 따라 단을 세워 지은 각 전각들의 지붕이 올망 졸망 보이고..
건너편으로는 태백과 소백의 준령들이 겹겹이 시야을 거슬릴 것 없이 시원스레 모두 절 마당으로 안겨있다
한참을 봐도 봐도 가슴 사무치는 풍경이다.
부석사 삼층석탑 보물 제 249호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으로 보통 법당앞에 세워져 있어야 하나 법당의 동쪽편 세워져 있다
조사당 오르는 길
부석사 조사당 -국보 제 19호
고려 우왕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건물내부 제석천,범천,사천왕상등 벽화는 1916년 수리 중 떼어내어
보장각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부석사 제 2의 목조건물로 고려시대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건물이다
조사당의 처마밑에 자라고 있는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란 전설이 있다
조사당내 의상대사 영정
떼어낸 벽화는 따로 보관하고 대신 다른 그림들을 붙여놓았다
윗 사진은 2009년 9월 방문시 사진입니다
왼쪽의 자인당과 오른쪽의 응진전
윗 사진은 2009년 9월 방문시 사진입니다
부석사 자인당
영주 북지리 석조 여래좌상 -보물 제 220호
윗 사진은 2009년 9월 방문시 사진입니다
원래 부석사 동편의 폐사지에 있던 불상을 부석사 자인당에 좌 우로 모셔 삼존불이 되었다
9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윗 사진은 2009년 9월 방문시 사진입니다
윗 사진은 2009년 9월 방문시 사진입니다
다시 내려오면서 삼층석탑 자리에서
그사이 비구름에 시야는 더욱 많이 가려졌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안양루와 석등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부석사 경내
안양루로 다시 내려가며 보는 무량수전
범종각
안양루
내려오면서 아까 올라갈때 못 찍은 사진도 한 장 찍고..
종각
설법전으로
부석사 설법전
설법전에서 예불을 올리는 서불산 회장님과 법우님들
아쉬워서 잰걸음으로 무량수전으로 한 번 더 올라
빠트린 무량수전 현판사진 , 선묘각사진을 카메라에 담고선..
무량수전 마당을 한 번 더 휘 둘러보고선 내려온다
아까 오를때 보았던 공포불을 한번 더 찍어보려하였더니 안개에 휩싸여 안량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부석사를 내려오며
비가 개면서 초록이 이쁘게 드러난다
일주문
의상대사와 화엄종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해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화엄종의 종풍을 날린 곳이다. 통일신라기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던
화엄사상이 서라벌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에서 뿌리를 내리고 펴져나갔다
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화엄사상의 요체인 즉 우주의 본질이 서로 상
대적인 관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관계를 바로 보고 거
기서 하나와 전체, 일념과 무량한 시간의 원리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다시 하나가 된다는 원융의 사상은 통일기 신라의 국가
경영에서 가장 절실했던 사상철학이었다.
삼국이라는 이질적인 국가체제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통치체제의
구축도 중요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삼국의 백성들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 정신
적인 구심점이 필요하였을 터 화엄사상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던
셈이다.
또 그 첫 출발점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나뉘어지는 봉황산 중턱으로 삼은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곳은 고구려와 신라가 일찍부터 힘을 겨루었던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는 이
곳을 장악해야만이 백제와 고구려 지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교두보를 마련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통일초기 이곳에 삼국경영의 새로운 사상적 웅지를
펼치기 위한 터로 낙점하였다는 것은 신라 국운의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 그러한 자신감은 안양루의 하늘을 찌를듯한 모습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부석사 일주문을 되돌아 보며
소백산 자락길
애초에 걸어보려 하였던 초암사에서 비로사 소백산 자락길
부석사 입구의 소나무
순례를 마치고 나자 비가 갠다
회장님이하 임원분들 준비하고 진행하시느라 고생 수고 많으셨습니다
축서사,각화사,부석사 순례길에 동참하신 법우님들 모두 반갑고
함께 하여 더욱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관오 이상용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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