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16 서불산 정기순례 01 문경 봉암사
문경 봉암사
안동 봉정사
안동 이천동석불(제비원석불)
오전 7시 30분 1호차 동대문역사문화역 출발 2호차 영등포 사당역 출발 한후
여주 휴게소에서 합류한후 서로 서로 인사
문경 봉암사 주차장에 도착한 후 봉암사 오르는 서불산 회원님들
일주문(봉황문)은 계곡 건너편에 위치하여 내려오면서 들러기로 한다
봉암사로 처음 들어서면 왼쪽의 해회당 오른쪽의 선열당 사이로
희양산 구왕봉 봉우리가 한가득 보인다
봉암사 선열당
봉암사는 연중 산문이 닫혀있고 1년에 단 한번 부처님 오신날에만 일반 신도에게 산문을 연다
신행단체에서 신청하면 제한적으로 방문이 허락되고 스님들 안거중 대중공양을 위해
방문이 허락되는 정도다
지금은 동안거 결재중이라 조용히 제한된 구역만 참배할 것을 당부하시는 안내 스님
지난 2011년 부처님 오신날에 처음 방문시는 태고선원구역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참배와 순례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안거중이라 극락전 ,대웅보전과 조사전 비각 금색전 일대만 참배가 가능하고 절마당과 요사근처로는 일반 참배객의 발길이 허락되지 않는다
봉암사(鳳巖寺)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宗刹)로 서, 879년(헌강왕 5)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도헌국사(道憲國 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가 창건한 이래 현재 까지 선도량(禪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께서 희양산 자락을 보고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였다
봉암사 극락전 오르는 길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일대를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여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조계종 종립특별선원 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산문을 닫은 이래 1년에 한 차례 ‘부처님 오신 날’에만
일반인에 공개한다.
전각에 봉황이 그려져있다
봉암사 대웅보전
대웅보전 앞 마당에 내려서지 못하게 되어 있어 대웅보전의 전체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위 사진은 2011년 5월 10일 부처님 오신날 봉암사를 처음 방문했을때 사진이다
대웅보전
태고선원뿐 아니라 요사의 곳곳 방마다 동안거 결재중으로 일반 참배객이 절마당으로 내려서지 못하게끔
적혀있다
마주보이는 누각은 남훈루
2011년 5월 10일 부처님 오신날에는 절마당 가득 봉암사의 백등이 가득 달렸었다
봉암사는 전통적으로 연등을 백등으로 제작하는데
수행 할 시간도 모자라기에 언제 연잎을 만들겠으며
또한 영가 등과 겸해서 하기 때문에 백등을 단다는 뜻도 있으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차별 없이 밝히기를 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봉암사 극락전 보물 1574호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극락전 내부
그러나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극락전 바로 옆에 위치한 산신각
봉암사 비각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鳳巖寺 智證大師 寂照塔碑) 국보 315호
탑 옆에는 탑비가 나란히 서 있어서 지증 대사의 생애와 행적을 알 수 있으며, 비문의 기록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헌강왕 9년(88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
(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쌍봉(雙峰)-법랑(法朗)-신행(愼行)-
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
(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
(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
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이러한 가치로 보물 제138호였다가 2010년 1월에 국보 315호로 승격되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보물 137호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탑이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881)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왕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이 탑은 전체적인 비례가 잘 어우러져 있으며, 안정감이 있다.
이 탑은 봉암사를 창건(創建)한 지증대사의 부도(浮屠)로서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8년(882)에 세운 것이다.
가릉빈가 조각이 방금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며 즐거이 음악소리를 들려줄 것 같다
비각
태고선원 바로 옆에 위치한 조사전
왼쪽의 문이 태고선원으로 들어가는 묘유문이다
조사전
조사전 옆에 위치한 봉암사 선방으로 통하는 묘유문 (妙有門)
( 다른 한쪽에는 진공문이 있다)
모든 것이 본질은 진공으로 실체가 없으되 묘유로써 존재하는(거짓되이 존재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문들이다
봉암사 태고선원 (太古禪院)
진공문 (眞空門)
금색전으로 내려오며 보는 조사전
희양산 봉우리 아래의 봉암사 조사전과 비각
금색전 (金色殿)
대웅보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으며 정면에는 금색전이라는 현판이
후면에는 옛날의 현판인 대웅전이 그대로 달려있다.
후면에는 옛날의 현판인 대웅전이 그대로 달려있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
오전 11시 10분에 대웅보전에서 아침예불이 열린다 하여 그전에 주어진 잠시의 시간이 촉박하여
금색전에서 10분간 앉아보았다
시원한 희양산의 정기가 폭포수처럼 정수리에 내려 꽂히는 듯 하였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45분간 오늘의 기도를 봉암사에서 하리라 생각하였지만
동안거 결재중 대중공양을 하기 위해 잠시 순례를 허락받은터고 단체로 움직여야하기에
아쉬움을 접었다
금색전 앞마당에 위치한 봉암사 삼층석탑이 수리중이었다. 탑 자체를 보는 것도 그렀지만
삼층석탑 아래 요사채에서 삼층석탑과 어울린 금색전과 희양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달랜다
봉암사 삼층석탑(聞慶 鳳巖寺 三層石塔) 보물 제169호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 2011년 5월 10일 처음방문시 찍은 사진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범종각
범종각에서 태고선원쪽으로 약간 오르면 태고선원의 정문이 진공문 (眞空門)을 만난다
진공문 (眞空門)
진공문을 통해 보이는 태고선원
태고선원 (太古禪院)
희양산 봉우리 아래의 태고선원. 희양산의 맑은 정기가 쏟아져 들어올 것 같다.
참선(參禪)을 통해 진공(眞空) 을 체득하고 묘유妙有 를 깨달아 진속이제 (眞俗二諦)에
중도 (中道)로서 자유로울수 있는것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해탈이라 할 것이다
봉암사를 대표하는 풍경이다.
남훈루
남훈루 옆에 금색전과 삼층석탑 아래에 위치한 요사채
지난 2011년 5월 10일 부처님 오신날 봉암사를 처음 방문하였을때
저기 툇마루에 앉아 5월8일 처음 시작해 3일째 된 매일 45분 기도를 하면서
앞으로도 평생 매일 기도하면서 살리라고 서원을 세웠던 장소다
그 매일 공부는 지금도 이어져 108일 5번을 회향하고 560일째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 110510 사진
요사채 툇마루에서 바라본 삼층석탑과 금색전 희양산 봉우리의 모습
오늘은 요사채로 내려가지를 못하게 하고 삼층석탑도 수리중이어서
금색전 마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오전 11시경 11시 10분에 있는 아침예불을 위해 스님들이 선방을 나와 대웅보전으로 모이신다
요사에서 정진하시는 스님들도 대웅보전으로 오르신다
스님들이 모이신 대웅보전 앞마당
봉암사 아침예불
오전 11시 10분 봉암사에서 수행정진하시는 100여명의 스님들중 60-70명의 스님들이
정좌하신 가운데 아침예불을 한다
대웅보전 안에 있는 종을 타종하고
타종소리가 고조되다가 가라앉으면
죽비 3번에 3배 3번에 아침 예불이 끝난다. 처음으로 대하는 장면이다
참으로 선찰답게 독특하고 특이하고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한 울림이 있는 아침예경. 불립문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선의 경지를 그대로 나타내는
멋드러진 예경이다
카메라 소리를 내면 않될것 같아 잠깐 녹화를 하고선 화면을 캡쳐하여 올려본다
아침 예불후 선방으로 돌아가시는 스님들
조사전옆의 묘유문으로 들어가시는 스님들
태고선원
대웅보전 옆 마당에서
대웅보전 앞마당과 남훈루
대웅보전 창살
아침예불이 금방 끝난관계로 공양시간까지 짬이 있어 마애불을 먼저 참배하기로 한다
남훈루
왼쪽의 구왕봉과 오른쪽의 희양산 암봉
구왕봉 아래 전각들
남훈루 앞의 다리를 건너 마애불 참배길
일주문부터 마애불까지는 스님들의 포행길이디
마애불 오르는 길에서 보는 희양산과 봉암사 전각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鳳巖寺磨崖菩薩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희양산 백운대에 위치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바위에 새겼다.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마애불에서 단체사진을 찍고자 하였으나 암벽을 둘러싸고 빙판이 심하여 아래에서 찍기로 하고
조심 조심 마애불을 내려온다
포행하시는 스님
마애불을 보고선 내려와 선열당아래 공양간에서 점심 공양을 하고 봉암사를 나서기로 한다
봉암사의 겨울나기 준비
봉암사에서 단체사진
원문 회장님이 찍으신 단체사진
다시 남훈루를 한번 더 바라보고선 다리를 건너 일주문 길로 나선다
일주문 길로 내려가시는 서불산 회원님들
일주문인 봉황문
일주문의 뒷면에는 봉황문이라 적혀있다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
봉암사 오를때 건너갔던 다리
저 절로 가는 길
02편 안동 봉정사 편으로 이어집니다
** 아래는 봉암사 결사 내용을 다시금 올려봅니다
봉암사 결사
지금부터 60년 전인 1947년 구산선문의 하나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청담,성철, 자운,보문,우봉스님들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오직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으로 공동 수행하자는 근본방침을 세우고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수행결사는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일으킨 획기적인 불사였다.
당시 한국불교는 조선의 억불정책과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하여 불법의 쇄락과 근본정신이 퇴색한 바
이를 바로 세우고자 "부처님 법대로" 라는 정신으로 결사를 추진하였다.
이 봉암사 결사 정신은 이후 승단 정화운동과 조계종단 재건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승
심회시켜야 할 원력이 되었다.
이에 공감하여 향곡,월산,혜암,법전,성수,법웅,보안,보경,지관스님등 삼십여명의 스님들이 점차 동참하여
수행 분위기는 더욱더 무르익어갔다. 결사에 동참을 원한 비구니 스님들은 백련암에서 정진하였다.
당시 봉암사 공동 수행 대중들은 대중공사를 열어 '공주(共住)규약'을 정하고 실천하였다.
---삼엄한 불계와 숭고한 조훈을 근수역행하여 구경대과의 원만 속성을 기함.
---여하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불조 교칙 이외의 각자 사견은 절대 배제함.
---일상유공은 자주자치의 표식하에 운수 종전, 파침, 탁발 등 여하한 고역도 불사함.
---작인의 세조와 신도의 특탁에 의한 생계는 이를 단연 청산함.
---가사는 ..... 괴색함.
---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에 취함.
---포살대계를 강송함.
등 열여섯 가지 청규를 정하고 만약 이를 실천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방부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공주(共住)구약은 부처님의 교법을 일상에서 복원하려는 스님들의 수행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부처님 법대로"의 방향은 조선불교 이래 일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훼손된 불교정신을 바로 세우겠다는 수행자들의 본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한 자급자족의 원칙을 세우고, 고역(苦役)수행하며, 소작인의
세조 및 신도의 특별 보시를 거부하였다.
이는 스님들 스스로 노력으로 결사 수행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보조 장삼과 괴색 가사를 착용토록 하여 복식에서도 수행자의 위의를 되찾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규칙적인 노동,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등의 연구를 통해 정기적인 포살등도청규에 반영하여
실천하였다
신도들도 스스로 불공하게 하였고, 평등 대중공양을 실천토록하고, 의식을 간소화하여 재(齋)중심
불교에서 수행중심 불교로 나아가도록 가르쳤다.
나아가 신도들에게 '보살계'를 설하여 수계의식을 거치게 하고 승보에게 삼배하는 예법을 되살렸다.
봉암사 결사를 계기로 승풍이 진작되면서 스님들을 삼보로 예경하는 법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이 봉암사 결사는 이전의 부처님 법에서 멀어진 잘못된 불교계의 관행과 폐습을 일거에 혁신한
하나의 '혁명'이었다.
더 나아가 보조 장삼과 괴색 가사의 복식 정비와 [금강경].[반야심경]의 독송의식, 신도의 스님들에
대한 예경법 정립 등을 통하여 수행자로서의 자부심과 위의을 갖추게 하여 불교의 위상 제고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봉암사 결사에서 만든 의식, 의례, 규칙 등은 이후 조계종단의 관례로 정착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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