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04 강화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 성지순례 01
화계불교대학 15기 주말반 동기회
화계사에서 아침 8시 30분 출발
강화도 초지대교 건너편의 김포 대명포구 전경
강화도 초지대교 옆에 위치한 초지진
김포군 대명리와 초지대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초지진은 성곽의 둘레가 500m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이다.
조선 말기, 한양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사건(1875년)을 거치며 외적의 공격을 막아낸 선조들의 피가 물들었던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다.
당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은 성곽 입구의 소나무의 포탄 흔적이 되어 아직도 남아 있다.
1679년 조선 숙종 때에 세워졌던 초지진은 수많은 전투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갯벌에 피어난 칠면초 군락
석모도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외포리 선착장에 도착
버스를 배에 싣고선 석모도로 향한다
새우깡을 향해 날아오르는 강화 갈매기들
보문사 입구에서 보이는 낙가산 눈썹바위와 마애관음보살상
부산 성암사에서 500여명의 분들이 성지순례 오셨다한다
덕분에 오후 2시쯤 석모도에서 나가는 뱃길이 꽉 막혀 석모도에서 2시간이상을 지체하였다
강화 낙가산 보문사 [ 普門寺 ]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 (635년)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하였다 전한다
보문사 올라가는 길의 소나무 숲
인천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자리하고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이다
오르는 길에서 보는 왼쪽의 법향루와 오른쪽의 범종각
낙가산의 눈썹바위에 조각된 마애관음보살상이 나뭇가지사이로 올려다보인다
오른쪽은 범종각이다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하신다는 인도 남쪽의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의 이름을 따서
산의 이름을 낙가산이라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보문사(普門寺))라
이름 지었다.
이처럼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있어
보문사는 창건의 역사부터 관음도량이다.
이후 보문사를 창건한지 14년 만인 649년 진덕여왕때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스물 두 분의 석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 일화는 유명하며
기도의 영험을 많이 보여 신통굴로 불리운다.
석실의 나한전 역사는 보문사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
새로이 조성된 야외의 오백나한전
보문사 찻집 감로다원
보문사 전경 - 왼쪽의 석실과 오른쪽의 극락전
보문사 맷돌
보문사 향나무
보문사 향나무와 그 뒤에 위치한 석실
보문사 석실 - 입구의 홍예문
석실 안에 봉안된 세분의 삼존상과 한분의 관세음보살상, 19분의 나한상은 눈썹바위의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더불어 보문사의 대표적 성보문화재다.
보문사가 관음성지인 동시에 나한신앙의 대표적 도량이 된 것은 바로 이 석실에 있는 나한상 때문이다.
이 석실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석굴사원이다. 이 석실의 역사는 보문사 창건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일화에 따르면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진덕왕 때 어부들이 그물에 걸려 올라온 석불상들을 이곳
동굴에 안치하였다고 전한다.
석실의 구조를 보면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아치형 홍예문(虹霓門)을 조성하였고 내부는 천연 동굴을 확장하여 만들었다 . 상단에 석가모니부처님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님, 송자관음보살님 그리고 이후에 따로 조성한 관세음보살님이 계시고, 18나한님이 모셔져 있다.
보문사 석실
창건 후 14년 뒤인 649년 신라 진덕왕 3년,
보문사 근처마을 어부들이 바다에 그물을 쳤다가 올려보니 특이한 형상의 돌덩이 22개가 그물에 걸려 나왔다. 어부들은 기이한 석상을 보고 놀랍고 두려워 바다에 던져 넣고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았다.
그물을 다시 걷어 올리자 아까 멀리 떨어진 곳에 던져버린 석상 22개가 그대로 다시 올라온 것이 아닌가.
어부들은 매우 놀라 다시 석상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서둘러 돌아왔다. 그날 밤 어부들은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맑은 얼굴에 훌륭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으로부터 왔느니라. 나와 더불어 스물 두 성인이 돌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는데
우리가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다시 물 속에 넣어 버리더구나.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부처님의 무진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 노승을 빈두로존자라고 부른다네. 우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보살님을 함께 모시고 왔으니 나와 더불어 나머지 열 여덟 분은 모두 부처님의 수제자들이라네.”
그대들은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그 인연과 공덕은 후손들까지 길이 누리게 될 것이니라."
보문사 극락보전 벽화중에서
다음날 다시 그물을 쳤더니 어제의 그 석상 스물 두 체(體)가 그대로 올라왔다. 석상을 낙가산으로 옮기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 이르니 석상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게되자 이곳이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고 굴 안에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과 열 아홉분 나한님등 스물 두 위의 석상을 모셨다.
그날 밤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그대들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빌어가게 될 것이다. 복을 줄 것이니 받은 복을 함부로 쓰지 말며 교만하거나 자만심을 버리라.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들일 것이니라. 모두 그 신령스러움에 감탄하였다.
그 후에도 나한전에서는 석굴 법당 앞의 “신기한 약수”와 고려왕실에서 하사받은 “깨지지 않는 옥등잔” 등 신비한 일화들이 많이 있다. 또한 나한전은 기도의 영험함으로 사람들 사이에 신통굴로 불리기도 한다.
나한님과 팥죽이야기
1892년(갑오년) 동짓날 있었던 일이다.
공양주 스님이 새벽에 일어나 팥죽을 쑤려고 부엌으로 갔으나 불씨가 꺼져버렸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따라 장등과 인등마저도 꺼져있었다. 절 안에 불씨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공양주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날이 밝으면 마을로 불씨를 얻어러 가야겠다고 자책하고 있을 때,
부엌에서 탁탁 하며 무엇인가 타는 소리가 들려 보니 장작불 타는 소리였다.
나가 보니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공양주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나한성중"하고 외치며 감격했다.
공양주 스님은 부지런히 팥죽을 쒀서 시간에 맞게 각 단에 공양을 올렸다.
아침공양을 마치고 날이 밝자 스님은 아랫마을(하고면 장봉리)에 사는 아는 노인의 집에 볼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노인은 스님을 보자 다짜고짜로 스님을 나무랐다.
"스님네들이 남의 집 자식을 맡았으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아끼고 가르쳐야지 이 춥고 어두운 새벽에 불씨를 얻어 오라고 그 어린아이를 보낸단 말이오?"
공양주 스님은 영문을 몰라 "절에는 어린아이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게 한 일이 없습니다."
"스님들이 거짓말도 하시오? 불씨를 얻으러 온 아이가 하도 추워하길래, 팥죽 한 그릇을 주었더니 다 먹던데요. 절에 불씨가 꺼져서 부처님께 팥죽 공양을 못 올리게 되어 불씨를 얻으러 왔다고 했소. 절에 불씨가 안 꺼졌단 말입니까? 그래도 아니란 말이오?"
공양주스님은 그제서야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에게 새벽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급히 절로 돌아와 석굴에 가서 여러 나한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 중의 한 분의 입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그 일이 있은 후로 동지만 되면 집집이 팥죽을 쑤어 공양하고 기도를 하였다.
이 일이 관행이 되어 백 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한다.
이 외에도 보문사에서 물건을 훔친 도둑이 밤새 도망다녔지만 날이 새어 보니 밤새 경내의 느티나무 주위만
뱅뱅돌다 지쳐스러져 잡혀 깨닫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등의 보문사 석실에 모셔진 나한전의 나한존자들과 얽힌 영험한 일화들이 많이 전해져온다
보문사 석실 바로 옆에 위치한 용왕전과 신기한 약수
아쉽게 음용수로 부적합 판정을 받아 약수의 실제만 보았다
보문사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올라가는 419 여개의 계단에서 본 와불전
오른쪽 바위는 석굴의 지붕이다
관음성전 계단불사 공덕비
마애불 올라가는 길에 위치한 용왕단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는 용왕단에서는 각자의 소중한 소원을 담아 소원지를 써서 유리병 속에 넣는다
100일이 지난 후 원지를 꺼내 스님들께서 축원하고 태운다고 한다
용왕단에서 내려다 보이는 서해바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이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한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썹바위 아래의 바위면에 새겨 모셨는데, 눈썹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는 형태다.
관음좌상의 모습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병(淨甁)을 받쳐들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계신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간다. 백호(白毫)가 이마 사이에 솟아 있으며,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마애관세음보살은 비록 오래전에 조성되지는 않았지만 보문사가 관음 성지인 동시에 관음기도 도량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문사 마애관음좌상 앞에서
화계사 불교대학 15기 동문회의 올해 관음도량 순례 회향 법회가 열렸다
여산거사님의 집전에 맞추어 천수경봉독과 참선 등이 진행되었다
마애관음보살상 앞에서 내려다 보는 서해바다와 보문사전경
보문사 극락보전
0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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