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111224-25 강릉 02편 등명낙가사/ 헌화로

관오덴짱 2011. 12. 25. 12:02

111224-25 강릉 02편 등명낙가사/ 헌화로




등명낙가사[ 燈明洛伽寺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괘방산 중턱에 위치한 해수관음도량의 조계종 사찰.






경내에서 바다가 보이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당시 강릉 지역은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가 자주 침범하던 곳이었다.

자장은 부처의 힘으로 이를 막기 위하여 부처의 사리를 석탑 3기에 모시고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는 수다사(水多寺)라 하였다.


석탑 3기 중 1기는 현존하는 오층석탑이고

1기는 19506·25전쟁 때 없어졌으며

나머지 1기는 절 앞바다 속에 수중탑(水中塔)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신라 말 전쟁으로 불에 탄 것을 고려 초에 중창하고 이름을 등명사(燈明寺)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있었고 절의 위치가 어두운 방 가운데 있는 등불과 같은 곳이라 하여 이름을 등명사로  바꿨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삼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빨리 급제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도 한다.

 



고려 때에는 매우 큰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

 

폐사된 이유로는 3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불을 질렀다는 설이며,


둘째와 셋째는 왕실에서 폐사시켰다는 설이다.

왕실에서 폐사시킨 이유 중 하나는 안질에 고생하던 어느 왕이 한 점술가의 말을 믿고 폐사시켰다고 한다.

그 점술가는 왕의 병이 정동쪽에 있는 큰 절에서 쌀 씻은 물이 동해로 흘러들어가 용왕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왕의 특사가 함경남도 원산(元山)을 거쳐 배편으로 이곳에 와 보니 점술가의 말과 같았으므로

 폐사시켰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절이 서울의 정동쪽에 있어 궁중에서 받아야 할 일출을 늘 먼저 받으므로,

정동쪽 등불을 끄면 조선에서 불교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주장에 따라 폐사시켰다고 한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56년 경덕(景德)스님이 천일기도 끝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친견하고 절을 중창한뒤

관세음보살이 늘 머무시는 보타락가산이라 하여 절 이름을 낙가사(洛伽寺)로 바꾸고,

옛 이름 등명(燈明)을 앞에 붙여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라 하였다.



 



오층석탑


1977년에는 주법당인 영산전(靈山殿)을 세웠고,

1982년부터 청우(淸宇)스님이 범종각과 삼성각·극락전·약사전·요사채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문비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37호로 지정된 오층석탑이 있다.

창건 당시 자장이 세운 3기의 석탑 중 하나로, 2층 기단 위해 4장의 장대석을 놓은 뒤

그 위에 다시 2장의 판석을 깔고 탑을 쌓았다.


기단이나 탑신부의 양식으로 볼 때 신라보다는 고려 초기 탑으로 추정된다.

 






2단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연꽃 잎을 조각한 사각형의 복련석(覆蓮石)을 덮고,

그 위에 아무런 조각이 없는 네모난 돌을 올려놓았으며,

그 위에 다시 사각형의 앙련석(仰蓮石)을 올려놓았다.

    






극락보전







주법당인 영산전(靈山殿)



영산전 중앙에는 석가모니불과 제화갈라보살·미륵보살을 봉안하고

그 주위에 청동석가여래좌상과 관세음보살입상, 지장보살입상이 있다.


그리고 중앙 불단 좌우로 모습이 각각인 청자 오백나한상을 봉안하여 오백나한전이라고도 불린다.

여기에 모셔진 오백나한은 인간문화재 유근형(柳根灐)5년에 걸쳐 옥으로 만든 것이다.

 

    



영산전에서 바라보이는 동해바다






범종각




삼성각







태백산맥의 한 줄기를 이어받아 동해의 푸른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괘방산의 중턱에 다소곳이 위치한 등명낙가사는

 이름에서 알수있는 것처럼 강릉 지방 해수관음도량의 요채라 할 수 있다.

 




정동진에서 등명낙가사를 거쳐 심곡항으로 가는길



헌화로는 군사 지역이라 민간인이 드나들 수 없던 곳이었다.


1998년 바다를 메워 도로가 생기자 장엄하게 드리운 기암 절벽과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듯한 도로가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헌화가 설화의 배경과 잘 맞아떨어져

관동대학교의 정인화 교수가 제안한 헌화로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헌화로는 북쪽으로는 강릉 정동진에서 남쪽으로는 금진항까지 이어진다

정동진역에서 금진항까지 가는 길은 차로 15.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인 정동진역만큼 바다와 가까운 길인 헌화로는,

동해의 설화를 품고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심곡에서 금진항까지 이어지는 헌화로의 백미 해안도로


정동진에서 심곡항 구간은 내륙도로이고 심곡항에서 금진항까지는 헌화로의 백미인 해안도로다

 한쪽은 무너져내릴 듯 아쓸아쓸한 기암절벽이고, 다른 한쪽은 금방이라도 파도가 길 위로 올라올 듯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다다. 바위를 타고 넘실대는 파도가 손에 닿을 듯 생생하다.



실제로 파도가 많이 치는 날에는 바닷물이 도로까지 밀려올 정도로 바다와 가까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도로다. 실제로 굽이굽이 해안선을 따라 난 길을 달려보면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이 든다.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달려도 좋고, 그냥 걸어도 좋다

 굴곡진 해안을 따라 굽이굽이 절경이 펼쳐진다.



기암괴석과 쪽빛 바다가 빚어내는 풍광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차를 타고 스쳐 지나기에는 아까운 풍경이다.

심곡항이나 금진항에 차를 세워놓고 잠시 걸어도 좋다.

 


 


아쉬운 점은 금진항에서 심곡항까지는 거리가 2.4km밖에 안 된다는 것

 

   



헌화로삼국유사에 실린 헌화가에서 유래한 도로명으로 신라 성덕왕대 순정공(純貞公)

강릉 태수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그의 부인인 수로부인이 바닷가 절벽 위에 핀 철쭉을 꺾어 달라 부탁했지만, 위험한 일이므로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 때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나서서 꽃을 꺾어 바치면서 헌화가를 불렀다고 한다






 

   


 

헌화가[ 獻花歌 ] 향가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肸不喩慚肸伊賜等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해독

딛배 바회

온손 암쇼 노시고

안디 붓리샤

것가 받오리이다.(양주동 해독)

 

현대어 풀이

붉은 바위 끝에(4구 꽃으로 연결),

(부인께서) 암소 잡은 (나의)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