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24-25 강릉 03편 삼화사 옥계휴게소(상행)
강릉의 신복사지 , 굴산사지 , 등명낙가사를 거쳐 삼척의 무릉계곡 삼화사로 향한다
무릉계곡과 삼화사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두타산(1,353m) · 청옥산(1,404m) 의 수많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동쪽으로14㎞를 내닫는 넓고 깊은 계곡이 무릉계곡이다.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에서 이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삼화사에서 쌍폭에 이르는 일대를 이른다.
무릉반석과 용추폭포는 각각 동해팔경 중 하나다.
무릉계곡
무릉계곡의 너럭바위(무릉반석) 바로 옆에 금란정이 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향교가 폐교되자 이 고장의 유림 선비들이 나라 잃은 수치와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金蘭契)를 만들고 기념 정각을 세우려 하였다.
일제의 훼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해방이 되자 그 자손들이 이 정각을 지었다.
본래 북평에 있었는데, 1956년 현재 자리로 옮겨왔다.
지금도 금란계원 후손들이 해마다 봄, 가을에 모여 선인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회(詩會)를 연다.
무릉반석
천여 명이 앉아도 너끈할 흰 너럭바위 곳곳에 옛 시인묵객들이 새겨놓은 글귀가 널려 있다.
무릉계곡의 상징이다.
넓적한 자연 암반을 흐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시상에 취했을 시인묵객들이 써놓은 글씨들이
바위를 장식하고 있다.
그중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것도 있고,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양봉래의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달필도 있다.
무릉반석의 글씨가 마모되고 있어 깊 옆에 재현해 놓았다
금란정과 무릉반석
그러나 김OO 식의 이름을 남긴 낙서도 많아 상처가 되어있다.
두타산[ 頭陀山 ] 삼화사[ 三和寺 ]
* 두타산[ 頭陀山 ] 1,353m
산이름인 두타(頭陀)는 불교용어로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동해시 삼화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10.2km 떨어져 있다.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1,353m) 청옥산(1,404m) 사이의 무릉계곡에 자리 잡은 삼화사는
두타산(頭陀山)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자장(慈藏)이 이곳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연대(黑連臺)라 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하지만, 경문왕 4년(864)에 구산선문 중 사굴산(闍堀山)파의 개조인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삼공정’(三公頂)에다 삼공암(三公庵)을 지었을 때부터 뚜렷한 내력을 갖는다.
* 삼공정’(三公頂) 하늘에서 신선 세 분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두타산에 자주 다녀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들이 내려와 노닐던 자리를 지금도 삼공정이라 부른다.
고려를 세운 왕건이 삼공암에서 후삼국 통일을 빌었으며 삼국을 통일한 것이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다 하여
태조 20년(934년) 왕건은 통일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공암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을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로 이름을 바꾸면서 노비와 사전을 하사하였다
삼화사는 이를 발판으로 산내에 8개의 암자를 창건하는 등 급격히 사세가 신장하였다
국행수륙대제와 삼화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고 친 고려 성향의 세력들을 포용하여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동해의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제를 설행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다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제가 설행된 배경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두 아들이 삼척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이며 이들 왕씨 일가의 영혼을 달래어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기 위하여
매년 왕실에서 주관하여 설행하였다
하늘과 땅 죽은자와 산자 사성과 육범의 모든 존재가 서로 소통함을 목적
삼화사가 창건된 신라말 혼란기와 고려건국 , 고려 멸망과 조선건국, 임진왜란 한국전쟁등 역사의 고비를
거치며 삼화사(三和寺)에 주어진 과제는 절의 이름의 유래처럼 서로 등진 이들간의 해원, 화해, 화합, 통일을 위한
기도였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제는 현재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야외에서 괘불을 내어걸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3일간의 장엄한 의식으로 치러지며 의례와 예능이 어우러진 축제로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1369년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왔다
1905년 의병(義兵)이 두타산성과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였다는 이유로 1907년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어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다
계곡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천왕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적광전이 자리 잡고 있다.
본래 동쪽 약 1.3km의 반릉 부근에 위치하던 절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1979년 8월에 무릉계곡 위쪽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일본의 괴롭힘도 다 견뎌냈는데 산업화의 시련까지 받게 되다니.
대웅전 앞 부처님의 시야를 가리는 높은 기암괴석의 병풍이 멋지게 보이지 않고
어째 좀 답답하게 느껴질 때면 더욱 안타까워진다.
그림으로 모셔진 사천왕
경내에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조노사나불좌상철불(보물 제1292호), 3층석탑(보물 제1277호) 및
고승의 부도(浮屠)와 비(碑)가 있다.
적광전 앞에는 얼마전까지 두 삼층석탑이 부처를 협시하듯 서 있었는데,
근래에 세워진 오른쪽 탑은 현재 철거되었으며
왼쪽에 고색을 풍기며 서 있던 탑 역시 사찰의 가람배치에 맞지 않아 최근 마당으로 이전 복원되었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은 선덕여왕 13년(644)에 세워진 것이라 전하지만
그 수법으로 보아 고려 때의 탑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높이는 4.95m,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았다.
녹슬고 휘어진 상륜부의 찰주 맨 꼭대기에 보주 하나가 꽂혀 있다.
적광전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조각이 우수한 철조노사나불좌상이 있다 (보물 제1292호)
그전에 삼성각에 철불(鐵佛) 한 구가 있었는데, 1997년 이 철불 뒷면에서 명문(銘文) 150여 자가 발견되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신라 34대 효성왕 3년에 삼형제인 약사삼불(백[伯], 중[仲], 계[季])이 서역으로부터 전해졌는데,
1657년 천재지변으로 흩어지고 맏형인 백(伯)의 불상만 하나 남은 것이라고 한다
적광전에서 내어다 본 모습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대승암(大乘庵)·성도암(成道庵)·은선암(隱仙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이 깃들어 있는 명승지인 두타산성(頭陀山城)·오십정(五十井)·용추폭포·학소대(鶴沼臺) 등이 유명하다.
삼화사는 인근 천은사, 영은사, 지상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지역의 중심 사찰로 선종의 종풍을 가진 깊은 역사성을 갖고 있다.
종고루
삼화사를 나오며 보는 무릉계곡
부도
정동진으로 올라가며 들러는 옥계 상행선 휴게소
바닷가에 붙어 있어 휴게소에서 보는 옥계해변의 전망이 일품이다
파도가 겹겹이 부서지는 옥계해변
거침없이 시원한 장면이다
정동진 모래시계 공원
선크루즈 리조트 야경
숙소인 모텔이 선크루즈 리조트 뒤쪽 위로 자리잡았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정동진 해변
숙소에서 바라보는 선크루즈 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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